삼십칠존이야기-26.금강희희보살

밀교신문   
입력 : 2019-04-22  | 수정 :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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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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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을 보고 가엾이 여기는 따뜻한 마음을 내는 것은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고통을 덜어주려는 부처의 자비심이다. 중생은 누구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나 무명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관찰하여 그들이 고통받는 것을 없애고 희망하는 것을 베풀어 주어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자비를 풀이하여 발고여락(拔苦與樂)이라 하는데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 자(慈)이고 고통을 뽑아주는 것이 비(悲)이다. 종교적 입장에서는 비(悲)가 중심이 되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생에게 기쁨을 주는 역할도 중요하다. 준다는 것은 재물이나 진리의 가르침이나 따뜻한 위로나 친절을 베품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때 베품을 받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이면 서로 막힘없는 연결이 이룩됨으로써 원래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 연결의 내용은 모든 존재는 서로 나눔으로써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누군가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몸은 끊임없이 채식이든 육식이든 다른 존재의 몸을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받기만해서는 안되며 나의 것을 내놓아야 한다. 비록 내놓는 것이 작아보이기는 하지만 나의 몸은 끊임없이 다른 이의 몸이 들어와 잠시 나의 몸이 되었다가 다시 다른 이의 몸으로 옮겨가는 물질의 순환 가운데에 있다. 나의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무수한 다른 이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이 나에게 들어오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무수한 다른 이에게 나의 생각과 사상과 감정을 전달한다. 다른 이를 통해서 내 정신이 성장하였다면 나는 다른 이의 정신이 성장하도록 돕는다. 몸이든 정신이든 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가 필요했고 나는 다른 이의 존재를 돕는다. 다시 말하면 남이 나를 만들고 나는 남을 만든다. 끊임없는 서로 만들어주는 순환의 고리 가운데 중생들 모두가 속해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이나 기술을 배우는 것, 노동을 하는 것도 모두 이 범주 안에 들어간다. 상점에서 식재료를 파는 것은 남의 식사를 위해서이며, 신발가게의 주인은 평생 남의 신발을 만들고 수리하고 판매하며 살아간다. 내가 공부해서 학자가 되는 것은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며, 의사가 되는 것은 남을 치료하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남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며 남을 위하여 살 때에 바로 자신을 위하는 것이 된다.
 
불자가 불도를 닦는 것도 오대서원에서 “중생가가 없는지라 제도하기 서원이라”고 하는 것처럼 타인을 위한 봉사를 실천할 때에 진실한 불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 주는 것이야말로 중생답게, 또는 불자답게 사는 길이다. 그래서 주는 것은 존재의 한 방식이며,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줄 때에 기쁨에 넘치고 기쁨을 주어서 상대방을 환희하게 한다면 삶의 가치를 실답게 아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주려는 마음을 불교에서는 희사(喜捨)라고 하며 또한 공양(供養)이라고 하거니와 주려는 마음을 통해서 부처님과 중생 모두에게 닿게 된다.
 
금강계만다라에서는 기쁘게 주는 존재의 모습, 즉 공양의 내용을 크게 여덟 가지로 나누어 8공양보살이라 칭하고 있다. 8공양보살은 대일여래가 4불의 공양에 응답하기 위하여 출생시킨 금강희, 금강만, 금강가, 금강무의 내4공양과, 사불이 대일여래의 공양에 답하기 위하여 출생시킨 금강향, 금강화, 금강등, 금강도향의 외4공양을 합한 총칭이다.
 
그 첫 번째가 금강희희보살이다. 금강희희보살의 밀호는 널리 공경을 펼친다는 뜻의 보경금강(普敬金剛), 그리고 성불의 수기를 준다는 뜻의 수기금강(授記金剛)이라 한다. ‘금강정경’에서 금강희희보살의 출생을 밝힌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때에 세존 대비로자나여래는 일체여래의 열락공양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삼마지에 드신다. 곧 일체여래부의 대명비를 자심으로부터 낸다. 일체여래심으로부터 내자마자 곧 대금강인을 낸 지금강자는 금강희희대명비의 형상을 출현한다. 금강살타의 모습과 같아서 갖가지 형색의 묘하고 좋은 위의를 갖추고 온갖 장엄구로 장엄하였다. 일체여래부의 금강살타명비를 모두 포섭하고 아축여래의 만다라 왼쪽 월륜 가운데에 머문다.”
 
‘금강정경’에 의하면 금강희희보살의 출생근거는 일체여래의 열락공양삼매이다. 이 삼매로부터 출생한 금강희희대명비상은 대비로자나여래가 자심으로부터 유출하여 동방 아축여래에게 공양하는 보살로서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체여래의 열락, 즉 보리심을 얻어 크게 환희하는 여성형의 모습이다. 이것은 바로 아축여래의 삼마지와 상응한다.
 
금강희희보살들을 출생하여 허공이 다하도록 법계에 두루한 동일체성의 금강계라고 하는 절대의 세계에 구름과도 같이 가득한 일체의 공양을 베푼다고 하는 것을 ‘삼십칠존례’에서는 일체여래의 기쁜 마음, 즉 적열심이라 하는데 이것은 위와 같은 사업에 의한 기쁨을 말한다.
 
‘성위경’에서도 비로자나불이 내심에서 금강희희법락표치삼마지지를 증득하여 금강희희표치광명을 유출하고 널리 시방세계를 비추고, 범부의 탐염과 세간의 쾌락을 깨뜨리고, 희희법의 원만한 안락을 획득하게 한다고 설한다.
 
여기서 금강희희의 법락표치삼마지라는 삼마지는 정법을 알게 된 기쁨의 깃발을 높이 받드는 삼마지로 일체의 여래도 일체의 중생도 모두 여여법성의 입장에서 하나의 맛이고 하나의 모습이기 때문에 일체의 여래신이나 일체의 중생신을 모아서 하나의 금강희희를 이룬다는 것이 그 뜻이다.
 
그 기쁨의 내용은 믿고 이해함을 통해서 불법의 진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서 무한한 중생들에게 믿음과 이해라는 공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믿고 이해함을 신해라 하거니와 가르침을 확신하고 잘 이해하며 나아가 향상하고자 하는 의욕이다. 밀교에서는 스스로 확신함에서 더 나아가 다른 이도 믿게 하는 것을 말한다. ‘대일경소’에서는 신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신해란 참되고 바른 발심에서 성불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을 통칭하여 신해지(信解地)라 이름한다. 이것은 용약의 뜻이며, 유희의 뜻이며, 신변의 뜻이다. 처음 발심한 이래 깊이 선근을 심어, 갖가지 서원과 수행을 일으켜서 불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성취시킨다. 언제나 수승하게 나아가고 쉬지 않는다. 즉 이것은 초월하여 오르는 등약의 뜻이다. 마치 사람이 북치며 춤추면서 뛰어난 삼업으로 널리 중생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같다.”
 
즉 참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인 보리심을 일으켜서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사이를 신해지라 한다. 동방 아축여래의 덕을 공양하는 금강희희보살은 중생이 처음으로 부처와 더불어 둘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고 크게 환희하며 이 기쁨을 널리 베푸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제불경계섭진실경’에 “금강희희는 시방세계의 모든 불과 보살들과 중생에게 환희를 준다”고 하듯이 이 보살의 진언을 염송함에 의하여 불보살과 모든 중생은 보리심공양을 성취하고 기쁨과 환희를 일으킨다. 비밀진언으로부터 삼매야형을 출생하고, 그 삼매야형인 금강인의 문에서 구덕지금강자는 비밀신변을 시현하는 것이다. 신변의 상은 가이없으며 다함없다. 그것은 여래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도 역시 삼매에서 무진장엄장이기 때문이다. 무진장엄장의 금강희희가 대비로자나여래로부터 동방 아축여래에게 보리심을 찬탄하고 기뻐하는 모습으로 공양되는 것이며, 이것을 불이나 중생이라 할 것 없이 모두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장엄한 광경이다.
 
기쁨을 주는 금강희희보살에 대해 ‘제불경계섭진실경’에서는 “금강권을 받들어 양 무릎 위에 두고 눈을 감고 회전해서 두루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을 예경한다. 이 인을 이름하여 금강희희라 한다”라고 설하고 있다. 동방 아축여래의 덕을 공양하는 보살로서 아축여래의 삼마지에 상응하는 희희의 표치로써 아축여래께 공양함과 동시에 시방세계의 모든 유정에게 보리심의 환희를 수여함을 보이고 있다.
 
이 보살은 금강계만다라 대월륜 서북방에 위치하고 성신회의 상은 흑색으로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다. 이 인상은 금강희희를 성취하는 까닭에 곧 금강의 오묘한 즐거움을 받는 모습이며, 금강희희가희계를 맺음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모든 환희를 받게 된다. 성신회에서는 두 손을 무릎에 얹고 있으며, 공양회의 상은 삼고저를 세운 연화를 양손으로 들고 있다. 삼매야형은 약간 휘어진 삼고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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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덕 교수/위덕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