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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실천, 전인실현

밀교신문   
입력 :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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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서화는 예(藝)입니까, 법(法)입니까, 도(道)입니까?”
“도(道)다”
“그럼 서예(書藝)라든가 서법(書法)이라는 말은 왜 있습니까?”
“예(藝)는 도(道)의 향이며, 법(法)은 도(道)의 옷이다. 도(道)가 없으면 예(藝)도 법(法)도 없다.”
“예(藝)가 지극하면 도(道)에 이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藝)는 도(道)의 향이 아니라 도(道)에 이르는 문이 아니겠습니까?”
“장인들이 하는 소리다. 무엇이든 도(道)안에 있어야 한다.”
 
소설가 이문열의「금시조」에서 예도(藝道)에 관한 석담과 고죽의 논쟁 중 한 부분이다. 예술을 통해 보수적인 사상을 추구하는 스승과 그에 맞서 개혁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제자와의 대립과 애증을 그리고 있는 한국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체육전문인’이라는 주제로 공부하면서 부여받았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접했던 소설이었다. 당시에는 석담과 고죽 간에 뚜렷하게 대비되고 있는 사상에만 초점을 맞춰 흑과 백의 이분법적인 렌즈로만 글을 이해했다.
 
세월이 흘러 현재 체육전문인이라 자신하기는 부끄럽지만, 지금껏 체육을 가르치고 공부하며 성장해온 과정에서 과거의 렌즈가 보다 다양한 색을 투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체육수업을 구상하고 계획해야 할 겨울방학 기간에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한번 끄집어내 보았다.
 
소설에서 석담과 고죽이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던 이유는 추구하는 예술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석담은 예(藝)보다 도(道)를 우선시했고, 고죽은 도(道)보다 예(藝)를 더 중시했다. 석담이 당시 사회적 분위기의 무게감과 중압감을 표현하고자 할 때, 제자 고죽은 외세의 핍박을 받는 민족의 현실보다는 순수하게 아름다운 글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상과 관점의 차이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갈등을 빚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제간의 대립관계에 회색지대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예술에 대한 관점과 이를 바라보고 느끼는 개인들이 가진 생각이 ‘좋은 것’과 ‘나쁜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통해 예술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할 수 있을 것으라고 생각했다.
 
결국 석담과 고죽의 사상은 전혀 달라 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둘의 사상이 예술이라는 공통분모 위에 있는 서로 다른 분자였음이 보였다.
 
이는 체육에도 인문적인 면과 과학적인 면이 존재하며 이 둘이 적절히 조화를 이룰 때 참다운 체육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으로 해석되었다. 마치 세상이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어 자연스러움을 이루는 것처럼 체육도 마찬가지로 기능적이고 기술적인 ‘기법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심법적’ 차원을 깨닫고 체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이렇게 스포츠가 ‘기법적’ 차원과 ‘심법적’ 차원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때 비로소 호울 스포츠(whole sports)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009년도에 읽은 금시조를 통해 2019년에 체육의 올바른 가치를 전달하고 전인교육을 지향하고 있는 교사로서 올바른 체육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복잡하고 다양한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석담과 고죽은 어느 한 곳에 치우침 없이 지혜롭게 중도를 지키고 현상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소설 속 가상의 인물들이 현실의 체육 교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새로운 한 해를 위한 수업을 준비하는 도중에 문득 떠오르며 가슴에 와 닿는다. 동시에 내가 교사가 될 수 있도록 많은 가르침과 비전을 제시해주었던 나의 지도교수가 꾸준히 외쳤던「체육실천, 전인실현」이라는 슬로건이 가슴속 깊이 울림을 주는 요즘이다.
 
손성훈/진선여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