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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즉불통(通卽不痛), 통(通)해야 살 수 있습니다.

밀교신문   
입력 :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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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삶을 위한 최우선의 척도는 ‘편안한 마음가짐’입니다. 건강한 삶은 곧 행복한 삶이기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스트레스 없이 살기는 어렵습니다. 과도한 경쟁 혹은 개인의 지나친 욕심 등으로 인한 심한 스트레스는 몸과 마음의 긴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삶에는 이완이 필요합니다. 이완에는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적당한 운동도 한 방법입니다.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내 삶에서의 이완의 방편은 ‘명상’입니다.
 
사람은 하나의 작은 ‘소우주’입니다. 긴장한 채 나를 잡고 있으면 몸은 경직되고 기운이 막혀서 소우주인 인체에 병이 생깁니다. 그런데 긴장을 풀면서 나를 놓으면 ‘대우주’와 합해집니다. 명상을 통한 이완으로 대우주와 하나가 되고 대우주와 하나가 되면 순간 저절로 충전됩니다. 긴장한 만큼 꼭 이완을 해줘야 합니다. 자성일 하루의 심공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일요일 하루는 엿새 동안 지낼 새로운 양심을 받아 가는 날이 되니 양(陽)이 된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휘발유를 넣어서 가는 것과 같이 이날 하루는 가장 보람되고 기쁘고 성스러운 날이 된다.”(실행론: 3-5-4) 이처럼 자성일은 에너지 충전이 되는 날이니 보람되고 기쁜 날이며, 대우주인 진리와 하나가 되는 날이니 성스러운 날입니다.
 
‘통즉불통(通卽不痛), 불통즉통(不通卽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는 뜻이다. 인체는 늘 자신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어딘가 막히면 ‘통증’으로 나타납니다. 통증의 수준에서 못 알아들으면 인체에는 ‘마비’가 찾아오겠지요. 통증과 마비는 인체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의 인체만 그런 게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똑같습니다. 막히면 통증이 오고, 그래도 안 풀리면 마비가 찾아옵니다.
 
“성낸 뒤에 원수의 매듭을 짓게 되는 일이 많은데 우리는 항상 이 매듭을 풀어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닿는 곳마다 화합이 이루어지고 친척 동기 친구 간에 의(義)가 있게 되고 집안은 화목해진다.”(실행론:5-6-16)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은 합리가 통한다는 것이고 건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은 합리가 통할 수 없다는 것이고 생명력이 죽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사회 구석구석에는 무늬만 소통이지 불통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방통행 아니면 잘해야 제팔 흔들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적 건강성에 통증과 마비로 고통받는 곳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생명력은? 그리고 나의 가정이나 우리 단체의 생명력은 어떠한가요?
 
인체에 이상이 있으면 인체가 먼저 말을 합니다. 내 몸속에 문제와 답이 함께 있습니다. 내 몸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가정도 그렇고 어떠한 사회조직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성원들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통증도 말이고, 피로함도 말입니다. 배고픔도 말이고, 배부름도 말입니다. 머리 아프고 배 아픈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몸이 하는 말에 내가 대답을 해주어야 합니다. ‘눈이 아픈 것은 보고 있는 것이 많은 것이고, 머리가 아픈 것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많은 것이고, 가슴이 아픈 것은 품고 있는 것이 많은 것이고, 어깨가 아픈 것은 지고 있는 것이 많은 것이고, 목이 아픈 것은 이고 있는 것이 많은 것이고, 팔이 아픈 것은 들고 있는 것이 많은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비가 오기 전에 얼른 내려놓으라는 당체법문입니다. 피로하면 쉬어 주고, 졸리면 자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스스로 정상이 되고자 하는 항상성이 있다. 사회적 조직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편 회당대종사는 현대 물질시대에 중생들의 삶에서의 통증을 세 가지로 크게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이른바 병(病)·빈(貧)·쟁(爭) 삼고(三苦)입니다. 병의 고통과 가난의 고통과 불화의 고통을 당체법으로 받아들이고 그 근본원인을 통찰(通察)해서 자기 인생에서의 불통(不通)을 통(通)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찰은 염송·희사·하심의 수행을 통해 자기 성품을 정화하고 심인을 밝혀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집니다. 즉 빈곤퇴치를 위해 희사를, 병고퇴치를 위해 염송을, 불화퇴치를 위해 하심(下心)을 강조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육바라밀의 실천입니다. 육행실천으로 복덕과 지혜를 원만 구족하게 갖추는 것은 통즉불통(通卽不痛)의 삶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길을 걷고 있나요? 우리 가정은? 그리고 우리의 조직의 생명력은? 통즉불통(通卽不痛)인가요? 통즉불통(痛卽不通)인가요? 숨소리가 시원해야 합니다.
 
보성 정사/시경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