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가만히 들여다 보는 경전-노력하다(2)

밀교신문   
입력 : 2019-02-25  | 수정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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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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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1월, 오스트리아 산악지역의 터널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총 3.2킬로미터 터널 구간을 달리던 산악열차가 530미터를 전진하다가 멈춰 섰고, 갑자기 연료에 불이 붙어 열차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승객 대부분은 불이 난 열차에서 탈출했고, 산 위쪽 방향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러나 터널은 이미 유독한 연기로 가득 찬 상태였고, 결국 155명은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산 아래 쪽으로 몸을 피한 열두 명 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3.2㎞나 되는 긴 터널 안에서 530m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면, 단순히 생각해봐도 앞으로 계속 가기보다는 뒤로 돌아서 나오는 것이 빠릅니다. 하지만 캄캄한 터널 속에서 불붙은 열차를 탈출한 승객들은 지독한 스트레스와 불안에 사로잡혔을 테지요. 패닉 상태에 빠진 터라 정상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치료 전문가인 미하엘 빈터호프는 자신의 책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에서 이 안타까운 사례를 통해 본능과 직관 두 가지를 거론합니다.
 
“스트레스와 위험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는 것은 직관이 아니라 본능이다. 직관과 본능은 완전히 다른 신발이다. 본능은 우리로 하여금 태곳적 반응 패턴을 따르게 한다. 즉 무리를 좇아 산 아래가 아닌 산 위로 도망치는 것이다. 본능은 너무나 오래된 것이라 오늘날까지도 종종 우리를 그릇된 방향으로 몰고 간다. 많은 연습을 통해서만 본능을 이길 수 있다.”(88쪽)
 
종종 본능을 따르는 것이 최선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인류가 생명을 시작한 이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시도한 다양한 경험치가 쌓이고 모여 이뤄진 것이 본능일 테니까요. 하지만 그때조차도 본능을 따를 것인가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연습을 통해야만 맹목적으로 본능을 따르는 잘못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저자는 “그 때문에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사고 현장에서 누구를 가장 먼저 치료할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본능에서 직관이 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훈련을 거듭한다”라고 덧붙입니다.
 
‘훈련’이라는 말이 흥미롭습니다. 연습을 하고 또 하는 일이지요. 한두 번 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연습하고 또 하는 일, 이것이 바로 노력이고 정진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긴급한 상황에서 스트레스와 불안에 휘말리지 않고 가장 올바른 판단으로 자신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내 자신에게 좋고 편한 것을 본능적으로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선하고 바른 것이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나에게만 좋은 것을 선택한 결과 다른 이에게 손해를 끼치고, 결국 내 자신에게도 불이익으로 다가온다면 다음번에는 그것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늘 같은 것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이웃과 자신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가 찾아오면 괴로워하고 울부짖습니다. 그러고도 또 같은 것을 선택합니다. 이런 악순환의 연결고리를 끊으려면 쉬지 않고 노력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이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하면 그저 맹목적으로 본능을 따르지 않고, 어떤 경우라도 차분하게 상황을 직시하고 가장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행은 하루 이틀, 몇 번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을 하자면 꾀가 나기 십상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과 행위로 자신도 이롭고 남도 함께 이로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정진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상에 은혜를 갚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은혜와 관련한 경전 문장은 뜻밖에도 참 많습니다. <정법염처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 가지 은혜가 있으니 그것을 갚기란 매우 어렵다. 첫째는 어머니 은혜요, 둘째는 아버지 은혜요, 셋째는 여래의 은혜요, 넷째는 법을 설해주는 법사의 은혜다. 누구든지 이 네 사람을 공양하면 한없이 큰 복을 얻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찬탄을 받고 미래 세계에서는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세상에는 보기 어려운 두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은혜를 갚을 줄 아는 것이요, 둘째는 큰 은혜는 물론이거니와 조그만 은혜라도 잊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으며, <대지도론>에서는 “은혜를 아는 것은 큰 자비의 근본이니 선업의 첫문을 열어 사람들의 사랑과 공경을 받고 명예가 멀리까지 들리며 죽은 뒤에는 하늘에 태어나고 마침내는 부처님 도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축생보다 더 심한 사람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승가나찰소집경>에는 앵무새 이야기가 나옵니다.
 
앵무새 한 마리가 나무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숲에 불이 일었습니다. 불이 점점 번져 온 숲을 다 태우며 급기야 앵무새 둥지가 있는 나무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앵무새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느 새들처럼 자신의 둥지를 버리고 안전한 곳으로 날아가 버리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앵무새 마음은 달랐습니다.
 
‘나무 한 그루에 기대어 잠시 그 몸을 쉬었다고 해서 그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을 일으킨 새도 있다고 들었다. 하물며 나는 이 나무에 둥지를 틀고 오래도록 살아왔는데 이 불을 끄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앵무새는 곧장 바다로 날아가 두 날개에 바닷물을 적셔서 돌아와 불 위에 뿌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둥이에 물을 머금고 와서 뿌렸습니다. 두 날개와 주둥이에 묻혀온 물이 과연 온 숲을 태우는 불을 끄는 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하지만 죽을힘을 다해 바다로 날아가 날개에 물을 묻혀 와서 불을 끄려고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하는 그 모습을 제석천이 보게 됩니다. 감동한 제석천은 앵무새를 위해 숲의 불을 꺼주었다고 하지요.
 
이 이야기는 <본생경(자타카)> 등 많은 경에 조금씩 다른 버전으로 실려 있습니다만, 주제는 똑같습니다. 작은 새조차도 자신이 깃들어 살던 나무의 은혜를 갚으려고 쉬지 않고 날갯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노력에 하늘도 감동하여 원하는 바를 이룬다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내가 쉬지 않고 일한 덕분입니다. 남보다 덜 자고 덜 먹고 힘써 노력해서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직 내 맨주먹으로 일궈낸 성공입니다.
 
그런데 경전에서는 세상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살게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굳이 경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이 말 뜻을 이해하고 수긍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나를 낳아준 부모가 있는 덕분이요, 그 부모님도 그 분들을 낳아준 부모가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내가 먹어온 곡식이며 채소, 그리고 육류까지 생각해본다면 이 내 한 몸을 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내가 다닌 학교, 내가 입고 있는 옷,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 등등.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닌, 수많은 힘이 잘 엮여져 짜인 그물과도 같습니다. 나는 넓디넓은 그물에서 하나의 작은 코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나지 않다’라고 말했지만 그 그물코 하나를 들어 올리면 그물 전체가 들어 올려 집니다.이 ‘나’ 속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함께 들어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것들이 서로 힘을 모으고 힘을 주고받으며 지내오고 있을까요? 그 엄청난 관계 속에서 단 하나라도 제 때 작용하지 않으면 지금의 나, 과연 이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수행자라면 이토록 고마운 세상, 그 세상에서 나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들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행동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웃과 사회와 세상이 힘들고 괴로워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말할 것도 없이 그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에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차 있다면 이런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해야 한다고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세상을 향해 은혜를 갚으려는 마음이 크고 간절할   수록 수행자는 더욱 부지런히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깃털에 물을 묻혀와 숲의 불을 끄려고 한 앵무새처럼,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 불자요, 수행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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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