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56-고행과 고생

편집부   
입력 : 2018-07-02  | 수정 : 2018-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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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榮華) 끝에 고(苦)가 오고 고생 끝에 낙(樂)이 온다. 부모 밑에 고행하면 자기 복이 많아지고 대성(大聖) 앞에 고행하면 세간에서 편히 살고 법신 앞에 정진하면 중생 고(苦)가 멸(滅)해지고 정진 고개 난행(難行)하면 소원함을 성취한다. 고생하고 고행하는 두 고통이 다른지라. 외도(外道)들은 잠깐 좋고 숙명적인 고생하되 행자(行者) 자진 고행하여 세간 고생 막고 있다.”(실행론 제3편 제9장 제7절 가)

축구영웅들!

짙푸른 잔디구장이 눈앞에 아른거리더니 이내 선명하게 드러났다. 돔구장을 가득 채운 관중들의 함성이 이어지고 있다. 한적한 시골 밤하늘 총총하게 떠있던 별빛이 쏟아져 내릴 때처럼 번쩍번쩍 하는 불빛이 연달아 터졌다. 선수들의 몸놀림도 드러났다. 통통 튀거나 서서 몸을 푸는 대표선수들이 입은 유니폼의 빨강색과 잔디구장의 푸른색,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머금은 황금빛이 혼합작용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돔구장은 한순간 검은 회색으로 변했다. 주위가 어두컴컴해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구씨는 눈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시나브로 잠에서 깨어나며 꿈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을 껌뻑거려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2018년 러시아월드컵대회 F조 조별리그 1차전이 있는 날이다. 스웨덴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었다. 일구씨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채비를 시작했다. 집을 나서기 위해서 하는 몸단장이라 해봐야 양치질을 하고 샤워를 하면서 세수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면도는 할 필요가 없었다. 곱게 자란 수염은 일구씨의 자랑거리였다. 치렁치렁 목에 걸고 다니는 메달처럼 갖은 정성을 다해 다듬고 가꾸었다. 미용실을 찾은 지가 몇 달은 되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길어 있는 머리카락은 어깨를 넘어 등짝까지 닿을 듯 말 듯 했다. 뒤에서 보면 영락없는 여인네에 다름없었다. 이 또한 이미 일구씨의 빼놓을 수 없는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있었다.

일구씨가 집을 나서기 전에 신경을 가장 많이 쓰고 정성을 듬뿍 기울이는 것은 수염다듬기와 머리카락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정해진 순서가 있다. 축구시합에서 짜인 전략에 따라 선수들이 움직이듯이 손동작도 순서를 따라 정확하게 짚어나가야 했다. 먼저 하는 일은 힘을 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는 일이다. 그 다음에는 귀밑에서부터 턱 선을 따라가며 수염을 가지런하게 매만진다. 간혹 옆으로 비어져 나온 수염은 새끼를 꼬듯이 가운데로 밀어 넣어서 정비한다. 한 올이라도 휘휘 날리도록 두는 법이 없다. 두 손이 수염 끝부분에 다다르면 손바닥을 편 채 다시 새끼를 꼬듯이 뾰족하게 다듬는다. 먹물을 잔뜩 머금은 붓을 화선지에 옮기기 전 벼루에서 여러 차례 벼리는 것처럼 시간을 두고 천천히 비벼야 한다. 머리카락을 정비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두 손을 펴서 손가락을 맞댄 상태로 이마에서부터 머리 결을 따라 여러 번 반복해서 쓰다듬어야 한다. 패턴은 수염을 매만질 때와 마찬가지다.

단체 응원을 위해 마련된 학교 체육관은 벌써 만원을 이룬 모양이었다. 교문 앞에서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확성기 소리와 사람 소리, 꽹과리와 북을 두드리는 악기소리가 한 덩어리로 뭉쳐져 학교 전체를 떠들썩하게 했다. 체육관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조차도 소리를 따라서 찾아 들어갈 정도로  끊임없이 믹스돼 나왔다. 일구씨는 체육관이 있는 곳으로 익숙한 몸놀림을 했다. 발걸음도 가볍게 성큼성큼 움직였다. 체육관 입구에 다다르자 안에서 터져 나오는 굉음이 귀를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확성기와 악기, 사람의 목소리가 어우어진 삼합의 굉음이 무엇을 뜻하는 소리인지 또렷하게 귀에 들리기 시작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시간을 두고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서였다.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출입구 쪽에 배치돼 있었던 사람들의 안내를 받아서 자리에 앉자마자 간신히 함성이 귀에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새 체육관에 모인 관중들은 박수에 맞춰 ‘대∼한민국’이라고 외치면서 선수의 이름을 하나하나 연호하기 시작했다. 모두 일구씨의 귀에 익은 이름들이다. 한 나라 축구의 명운을 책임지고 있는 전사들이요, 영웅들이 아니던가. 일구씨도 관중들이 연호하는 소리에 맞춰 대한민국 축구영웅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따라서 불러보았다. 첫 번째 선수의 이름을 외치는 순간 머리카락 끝이 뾰족하게 공중으로 치솟는 느낌이 들면서 온 몸으로 전율이 흐르는 것을 감지했다. 그동안 고여 있던 피가 요동치면서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굳었던 전신이 스르르 녹아내리면서 꿈틀거리는 듯도 싶었다. 새삼 생동감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일구씨는 축구영웅들 덕분에 자신도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 같아 기분 좋게 박수를 치면서, 다리를 움직여 발을 굴리기까지 했다. 체육관에 모인 관중들과 함께 호흡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관중석이 조용해졌다. 이내 경기가 시작된다는 중계방송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흘러 나왔다. 해설위원들이 자신의 생각과 이론을 덧대서 상황설명에 열을 올리는 말도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어떤 돈을 주고도 구경할 수 없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각본 없는 드라마의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구씨도 손을 쥐었다가 폈다 하면서 초조한 기다림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관중들의 열띤 응원이 한 차례 더 이어지고 나서 경기의식이 시작됐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관중들은 일제히 일어나서 애국가를 따라 불렀다. 애국가를 마치면서 ‘대∼한민국’이라고 몇 차례 더 연호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국민들의 관심과 체육관에 모인 관중들의 열기와는 달리 경기는 차분하게 시작됐다.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가 관중들을 더 흥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일구씨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선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차례대로 되새겨보았다. 저들이 이 자리에 서있기까지의 수고로움을 생각해봤다.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양의 땀을 흘리고,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참고 견뎠을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면서 울컥하는 감성에 빠져들었다. 그러는 가운데 어느 순간 관중들의 숨소리마저 잦아들면서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떨리는 듯싶었다. 한 선수가 헤딩을 하려다 쓰러졌다는 것이다. 공이 눈을 정통으로 강타한 것 같다는 말이 일구씨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 일구씨는 한동안 먹먹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자꾸만 흘러가는데도 선수가 일어났다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초조했다. 선수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애를 태웠다. 일구씨는 더 이상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또다시 악몽이 시작됐다.

방송에서는 이번 경기에서 무너지며 월드컵대회 첫 경기 무패행진도 좌절됐다고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대회 이후 16년 만에 제동이 걸렸다는 것이다. 패배의 역사는 20년 만이라고도 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대회 멕시코전에서 선취골을 기록하고도 1-3으로 패한 이래 20년 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리의 역사는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덧붙여서 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대회 첫 경기에서 폴란드를 상대로 2-0 승리를 따내며 첫 승의 기록을 낳았다는 것이다. 이후 2006년 독일월드컵대회에서 토고에 2-1 역전승을 거뒀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대회에서 그리스를 2-0으로 제압하면서 기록을 쌓아왔다는 말이다. 3개 대회 연속 첫 경기의 승리를 챙긴 다음에는 2014년 브라질월드컵대회에서 러시아와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무패행진을 이어온 역사가 있다고도 했다.

눈을 다친 선수가 있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일구씨 혼자 겪은 환청이고 환영이었다. 일구씨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쓰다듬으며 악몽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