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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칠존이야기 9- 업바라밀

밀교신문   
입력 : 2018-06-01  | 수정 : 2018-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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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

흔히 인생을 빗대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에 비유한다. 수많은 재산을 불려놓은들 저 세상으로 갈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말이다. 가족이나 친구도 마찬가지이고 아무도 동행할 수 없다.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왕들은 무엇인가 가져가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고대 왕들의 무덤을 파면 수많은 부장품이 나오고 심지어 저승길에 함께 동행하도록 순장한 자들의 유골도 나온다. 부질없는 짓이기는 하나 가져갈 수 없음에도 가져가고 싶어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저승길 노잣돈이라고 하는 형태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놓고 가는 것들에 대해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녕 저 세상으로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중생들은 윤회하는 가운데 지어놓은 수많은 업이 있다. 대인관계에서 발생하는 선악업과 생활하면서 지은 수많은 업이 다음 생으로 연결된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짊어지고 가는 주체가 없이 업 그 자체가 갈 뿐이며 업에 의하여 전생과 금생 그리고 후생이 이어진다.

업이란 갈마(羯磨)라고도 한다. 행위와 의지에 의한 말⋅동작⋅생각과 그 세력, 즉 심신의 활동과 일상생활을 의미하며, 일반적으로 신체와 말과 생각의 셋으로 구분한다. 선업이나 악업을 지으면 이것이 업의 인이 되어 업의 과보가 생긴다. 그리고 과보와 동질성의 습기가 잠재여력으로 남아 업장이 된다. 육체 위에 드러난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욕락에 빠지고 이것에 집착함으로써 생겨난 업은 갖가지 망념을 통하는 동안 번뇌로 더욱 무거워진다. 그 업에 의해서 스스로도 고뇌하고 타인을 괴롭히며, 갖가지 죄나 장애를 지으며 생사에 윤회하는 것이다. 무릇 태어난다는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업이라는 부모가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며, 죽는다는 것도 내가 바란 것이 아니라 업이라는 귀신이 나를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우선 이와 같은 업의 구속을 물리치고 마음의 광명을 밝혀 온갖 괴로움의 덩어리인 생사에서 초탈해야 한다. 그것은 업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면서 동시에 업을 잘 활용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불교경전에서는 악한 과보를 받지 않도록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지으라고 설한다. ’율장’에 나오는 수많은 금지조항들은 수행하기에 적합한 좋은 습관을 유지할 수 있도록 온갖 악한 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하면 안되고, 저것도 할 때에는 조심하는 습관이 길러진다. 수행을 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는 하나 이러한 태도는 자기자신은 청정하게 할지라도 타인에 대해 수동적 경향을 보일 것이 틀림없다. 무엇인가 새로운 업이 생겨나는 것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능동적 경향으로 바꾸는 것이 업바라밀이다. 나쁜 일은 피하고 좋은 일만 하고 싶어하는 것이 중생이므로 무엇인가를 두려워한다면 중생을 위한 보살행은 불가능하다. 나쁜 일을 당했을 때에 의기소침해하거나, 좋은 일을 만났을 때 의기양양하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당면한 모든 일들은 나쁜 일이거나 좋은 일이 아니라 그냥 일이며 인연따라 온 것으로 담담한 마음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것, 이것이 업바라밀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이다.

’금강정경’에 이르기를 “삼계 속에는 분별할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탐욕을 보고 떠나는 것 또한 죄가 된다. 왜냐하면 물들음 속에 청정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와 같이 물들음과 청정을 하나로 아는 자야말로 해탈한 자이다”라고 하고 있다.

행위이기는 하지만 과보를 바라지 않는 행위가 불보살의 부사의업이다. 그래서 물들음과 청정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금강계37존 가운데 업바라밀은 바로 이러한 부사의한 삼밀의 교화행을 상징하는 존격이다. 중생들의 삼업을 여래의 삼밀로 전환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우리의 행위는 고양된다.
’성위경’에는 다음과 같이 업바라밀의 삼마지를 설한다.

비로자나불은 내심에서 갈마금강대정진삼마지지를 증득하고, 자수용인 까닭에 갈마금강대정진삼마지지로부터 갈마광명을 유출하며, 두루 시방세계를 비추어서 일체중생의 온갖 게으름을 없애고, 대정진을 이루게 한다. 돌아와서 한 몸에 거두어지며 일체보살로 하여금 삼마지지를 수용케하기 위한 까닭에, 갈마바라밀형을 이루고, 비로자나여래의 왼쪽 월륜에 머문다.

여기서 갈마는 금강갈마로써 대정진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라서 갈마바라밀이란 비로자나불의 끊임없는 창조의 활동을 상징한다. 그것은 우주대생명이 변화를 지어내는 모습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불공성취여래의 속성인 변화·창조의 활동이다. 업바라밀이 상징하는 성소작지는 북방 불공성취여래의 지혜로서 온갖 행위를 지어 행하는 전5식, 즉 눈ㆍ귀ㆍ코ㆍ혀ㆍ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은 인식을 돌려서 얻는 지혜이다. 이 지혜는 10지 이전의 보살과, 이승, 범부 등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시방에서 삼업으로 여러 가지 변화하는 일을 보여 각기 이익하게 하는 지혜이다. 우리들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하여금 일에 따라서 응용하여 지혜로써 움직이면 어긋남이 없다. 눈으로 보든지 귀로 듣든지 육근 가운데 어떤 것을 받아들일 때 바르게 받아들여 두 모습이 없는 것이 성소작지이다.

신라의 원효는 이 성소작지가 부사의한 일을 만들어낸다고 하여 부사의지라고 하였다. 부처의 신체적 구조는 중생과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중생을 교화하고 그들의 중죄를 소멸시키는 등 훌륭한 과보를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부사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작업의 지혜로부터 비로자나불의 작변화신을 나타내므로 업바라밀이라 한다.

이 세상은 환상이기에 주체의 자발적 의지에 의하여 무엇으로든 변형이 가능하다. 변화의 몸을 지어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주가 그의 몸이므로 전체의 변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금강계만다라의 제존이 모두 비로자나여래의 대비에 의해 투영된 영상이기에 그 영상으로 나타난 몸은 자재하게 일체세계에 투영되며, 일체제불과 일체불국, 그리고 모든 세계를 그 몸에 받아들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외만다라에 지옥이 편입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중생교화활동을 펼칠 수 있는 곳이야말로 보살이 머물러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구경방편이기에 밀교에서 모든 예토는 정토로 바꾸어나가야 할 국토로서 모든 예토를 변화시킴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정토는 바로 정토로 만들어야 할 사바세계에 있다. 구경방편이므로 중생교화사업이 바로 정토이다. 구경이 방편인 밀교의 이상세계는 보살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로서 모든 중생들이 불성을 지녔음을 보고 이를 교화하는 것이 구경이며, 중생이 무한하므로 비로자나불의 성소작지를 나타내어야 할 국토도 무한하다.

마치 중생이라는 꿈을 꾸는 자가 깨닫고 보니 모두 꿈과 같은 환상인줄을 알게 될 때, 더 이상 꿈과 같은 중생놀음은 끝난다. 그러나 그 꿈속에는 이것이 꿈인줄 모르고 꿈속에 헤매고 있는 무수한 중생들이 있다. 그들을 위하여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함께 꿈을 꾸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은 부사의한 업의 활동으로 생명의 창조활동인 신변유희이다. 행위는 있되 업으로부터 자재한 것이 업바라밀의 부사의한 신변유희이다. 업에 구속되지 않으며 업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적극적 행위로써 그때그때의 상황에 맞춘 지혜를 운용하는 것이 업바라밀의 정진이며, 신변유희로써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의 활동이다.

업바라밀은 법명을 업금강녀라 하며 밀호는 ‘성취금강’이라 한다. 갈마삼매로부터 출생한 업바라밀의 대금강갈마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