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10

밀교신문   
입력 : 2018-02-09  | 수정 : 2019-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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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으로 이성을 탐하다

왕의 악몽, 붓다의 해몽

인도 강대국 가운데 하나인 코살라국.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달아올랐습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왕의 퍼레이드입니다. 왕궁에서 가장 값비싼 보석으로 한껏 멋을 낸 왕은 권세와 위엄을 백성들에게 과시하며 자기만큼이나 화려하게 치장한 코끼리 등에 올라타고서 천천히 도심 한 가운데를 행진했습니다.

어느 거리 모퉁이를 지날 때 왕은 무심코 시선을 높이 들었다가 어느 여인의 얼굴을 보게 됐습니다. 여인은 거리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에 이끌려 창가로 나왔다가 왕의 행진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왕의 얼굴을 아주 잠깐 본 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여인은 이내 모습을 감췄습니다. 그런데 왕에게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습니다. 멀리서 스치듯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남다른 여인의 미모를 왕은 보아버렸습니다.

이후의 퍼레이드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왕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여인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여인의 소재를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불행하게도 그 여인은 이미 결혼한 신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왕인 파세나디에게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습니다. 왕은 즉시 그녀의 남편을 불러들였고 인간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귀한 연꽃을 구해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남편은 아름다운 아내를 탐한 권력자의 무모한 명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습니다. 하지만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남편은 인간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고, 왕은 틀림없이 과부가 되어버릴 젊은 여인을 거리낌 없이 궁으로 불러들일 날만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왕은 젊은 여인을 후궁으로 맞아들일 생각에 한껏 부풀었고, 욕정에 불타오른 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한밤중에 악몽에 시달리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습니다. 왕은 잠을 이루지 못해 날이 밝기만을 기다렸고, 해가 뜨기 무섭게 제사장(바라문)을 불러들였습니다.

“지난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소. 악몽을 꿨소.”
“폐하. 꿈을 말해보십시오.”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소. 시뻘겋게 달궈진 무쇠 솥에 남자 네 명이 삶겨지고 있었소. 그런데 이 남자들은 삼만 년 동안 솥 바닥에서 푹 삶아졌다가 간신히 끓는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소. 너무나 고통스러워 하소연하려는 듯 입을 열었는데….”

제사장이 물었습니다.
“그 남자들이 뭐라고 비명을 질렀습니까?”
“한 남자는 ‘두-’라고 소리 질렀고, 두 번째 남자는 ‘사-’, 세 번째 남자는 ‘나-’, 네 번째 남자는 ‘소-’라고 외쳤소. 하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소. 그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들은 솥바닥으로 가라앉았기 때문이오. 이보시오, 제사장. 행여 내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기려는 암시가 아니겠소?”
제사장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처럼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하면 그동안 쌓아올린 신망과 권위, 그리고 그에 따라오던 재물들은 한순간에 흩어지고 말 것인지라 제사장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폐하.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건 정말 흉하기 짝이 없는 일의 징조입니다. 폐하의 신변에 대단히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파세나디왕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밤새 염려했던 일을 제사장의 입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어떻게 하면 그 흉한 일을 피할 수 있을까?”

제사장은 말했습니다.
“희생제를 올려야 합니다. 일찍이 없었던 가장 큰 규모로 준비해야 합니다. 수 백 마리의 코끼리와 말, 황소와 암소, 염소와 당나귀, 양이며 닭, 돼지를 준비하도록 명하십시오. 그리고 수백 명의 소년과 소녀도 함께 신에게 공양 올려야 합니다.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희생입니다.”
왕은 즉시 명을 내렸습니다. 궁궐 주변에 공양제를 올릴 단이 준비됐고, 희생양으로 쓰일 가축과 사람들이 산채로 붙잡혀 왔습니다. 사방에 저들의 비명소리가 들끓었습니다. 가축들은 소리 높여 울어댔고, 희생물로 쓰일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세상은 뒤숭숭해졌고, 민심도 흉흉해졌습니다.
“대체 얼마나 흉한 꿈을 꾸었기에 저토록 많은 산목숨을 희생하려는 거지?”
“사람까지 희생한다잖아.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던데…”
“왕의 목숨 하나를 위해 대체 얼마나 죽어야 한다는 거야? 이러다 나도 다음번에 저 기둥에 묶이는 거 아닌지 몰라.”

사람들의 원성이 높아졌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도시에 가득 찼습니다. 파세나디왕은 흉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애초 후궁으로 들이려던 여인에 대한 생각도 사라졌습니다.
한편, 왕에게는 현명한 여인 말리카 왕비가 늘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왕비는 어수선한 민심을 읽고 있었습니다. 왕의 흉몽보다 민심의 흉흉함이 더 무겁다는 것을 왕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왕에게 달려가 간청했습니다.

“폐하, 다른 목숨을 죽여 자기 목숨을 구하시려 하시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 제사장의 해몽이 맞는지 틀리는지 어찌 알 수 있습니까? 가까운 곳에 붓다께서 계시는데, 어찌 그 분에게 여쭈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말리카왕비는 붓다의 신자였습니다. 그녀는 가난하고 낮은 신분의 여성이었지만 이른 아침 탁발에 나선 수행자에게 자신의 한 끼를 즐겁게 보시한 공덕으로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신분이 낮은 데다 얼굴이 예쁘지도 않았던 그녀. 하지만 인품이 매우 뛰어나고 지혜로워서 궁궐의 여인들이 말리카를 제1왕비로 추대했던 것입니다.

왕비의 간청에 왕은 붓다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꾸었던 꿈을 자세히 고하면서 두려웠던 긴 밤의 고통을 하소연했습니다. 붓다는 말했습니다.
“왕의 죽음을 암시하는 꿈이 아닙니다. 꿈에서 본 남자 네 명은 저마다 지난 생에 저지른 악행에 따른 과보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붓다의 해몽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들 남자 네 명은 아주 큰돈을 벌자 어떻게 쓸까 의논을 했습니다. 수행자에게 공양 올릴 수도 있고 가난한 이들에게 보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내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그 돈으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음식을 사먹고, 값비싼 술을 마실 뿐만 아니라 여인을 사서 쾌락에 맘껏 젖어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결혼한 여인들까지 돈으로 매수해서 쾌락을 즐겼습니다. 욕정을 이기지 못한 이들은 넘어서는 안 되는 선까지 그렇게 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남자들 앞에는 길고도 긴 지옥고통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왕의 꿈에 나타난 남자들의 외마디 비명은 지옥고통을 겪고서야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깨닫게 된 남자들의 한탄이었습니다. 방탕한 욕정에 사로잡힌 결과 찾아온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음절을 입 밖에 내기 무섭게 뜨거운 솥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다시 오랜 세월 삶겨지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담담히 왕의 꿈을 풀어주었지만 왕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버젓이 남편이 있는 여인에 눈이 멀었던 자신. 권세를 이용해 약자를 함부로 농락하려 했던 자신을 부처님이 꿰뚫어 보고 계시는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욕정에 마음이 팔려 그릇되게 행동했고, 그 결과 악몽에 시달리다 깨어난 채 길고긴 밤을 잠 못 이루며 두려움에 떨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았습니다. 왕은 자신의 심경을 부처님께 토로했고 그 심경은 다음과 같은
법구경 게송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지친 나그네에게 길은 멀구나.
바른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끝이 없어라.”(법구경 60번째 게송과 그 인연이야기)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뒤 서둘러 궁으로 돌아가서 희생양으로 쓰려고 잡아들였던 산목숨들을 풀어주었습니다. 물론, 욕정에 눈이 멀어 강제로 범하려 했던 여인과 그 남편에 대한 명도 거뒀습니다.

지옥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욕정을 함부로 부린 자들의 뒤늦은 후회의 신음이라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들려오는 ‘미투’의 외침은 피해를 당하고서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던 약자들의 신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랑은 모습을 감추었고 일그러진 욕정의 폐해만이 가득합니다. 권세나 돈이나 힘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자기 욕정의 배설구로만 여긴다면 지옥의 문을 여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방 몸에 손을 대거나 함부로 말을 던지는 것도 똑같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는 존중받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듯 상대방도 그럴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기억한다면 ‘미투’의 외침도 지옥에서의 외마디 비명도 언젠가 잦아들 것입니다. 

10. 파세나디왕과 욕망.jpg

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