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지상법문

지상법문 24

편집부   
입력 : 2018-02-09  | 수정 : 2018-02-09
+ -

공덕은 나누어 가질 수 있는가?

과연 자기가 쌓은 공덕을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닙니다.

고려 때 ‘불일 보조국사’라는 시호를 받은 위대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법명은 ‘지눌’입니다. 이 덕 높은 스님에게는 손위 누이가 한 분 계셨는데, 아우와는 달리 마음은 닦지 않고 노는 데만 정신이 팔렸었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스님이 마음공부 좀 하시라고 하면, 누이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까지 굳이 마음공부를 할 필요가 있어? 설마 아우가 그렇게 많이 쌓은 공덕을 가지고도 나 몰라라 할까?”

스님이 기가 찼겠지요. 말로는 누이를 제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루는 누이가 방문하는 날을 잡아 진수성찬을 차렸습니다. 그러고는 누이가 들어오기를 기다려, “오셨습니까?” 한마디만 하고 본체만체 혼자서 음식을 다 먹어치웠습니다. 당연히 누이가 화가 났겠죠? “아우는 어찌 날 보고도 음식을 함께 먹자는 말도 하지 않는가? 몇십 리를 걸어오느라 내가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알아?” 그러자 스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님, 제가 먹은 음식이 누님의 배를 채울 수 없듯이 제가 쌓은 공덕으로 누님을 구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에 감화한 스님의 누이는 그때부터 지성으로 마음공부를 하고 선업을 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목련존자가 악업을 쌓아 화탕지옥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어머니를 구제한 일화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이야기에는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가 부모님의 은혜를 잊지 말자는 직설적인 뜻이라면, 그다음은 자신의 공덕은 결코 남과 나눌 수 없다는 메타포입니다. 엄청난 수행과 정진으로 대신통을 얻고 부처님의 총애를 받던 목련도 스스로 죄를 지은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수많은 난관을 거칩니다. 어머니의 구제가 바로 인간으로의 환생으로 바로 이어지지도 않습니다. 이 일화는 일단 아귀를 거쳐 축생으로 환생하긴 했으나 이후의 과는 순전히 어머니의 몫이지 아들 목련의 공덕과는 상관없다는 은유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서로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공덕을 나누어줄 수도 없습니다. 스스로의 업이 분명하게 다르기 때문이지요. 내가 지은 업은 내가 받아야 하고, 자식이 지은 업은 자식이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을 위한 서원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눌 스님의 누이가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공부에 전념하게 된 것은 아우인 스님의 공덕과 진심 어린 서원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목련존자의 공덕과 서원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어머니는 끝까지 참회하지 않았을 것이며, 왕사성 어느 집에서 개의 몸으로 환생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남을 위한 서원의 효과는 분명히 있습니다. 보통 선업을 쌓은 부모 밑에서 선한 자녀가 자라납니다. 악업을 쌓은 부모 밑에서는 자녀들이 악의 기운에 물들기 쉽습니다. 반대로, 선업을 쌓은 부모를 둔 아이들이 악에 물들 수 있으며, 악업을 쌓은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선행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이 쌓은 공덕이 미치는 효과는 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결론적으로, 공덕은 나누어줄 수 없습니다. 남이 쌓은 악업을 제도할 수 없는 것이 불세계의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공덕을 쌓고 남을 위한 서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지눌 스님의 누이처럼, 목련존자의 어머니처럼 스스로 악업에서 벗어나 선업을 행할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다만 자신이 쌓은 공덕이 없이는 남을 위한 서원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남이 대신해 주는 의뢰적인 불공은 인과를 깨칠 수 없지만, 자신이 직접 하는 밀교법은 본심선행 공덕으로 능히 인과를 깨칠 수 있다.”<실행론>

이행정 전수(보원심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