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소위 ‘제 앞가림’ 문제를 놓고, 때로는 모르는 남녀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어느 학회 세미나에서 남녀 두 학자가 의견 차이로 열띠게 토론하던 중에 남성 학자가 이렇게 질문을 했어요.
“여성학도 있고, 아동학도 있는데 남성학이 없는 이유가 대체 뭡니까?”
그랬더니 그 여성 학자가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건 아동학으로 충분히 커버가 되기 때문이지요.”
짧은 말이라도 말 속에 뼈가 있는 법이에요. 남자들은 유치하고 철이 없으니 아동학만 있으면 되지, 굳이 남성학이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는 항변인 거지요. 사실 참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면 남자들의 사고방식이 때로는 철없는 애들처럼 유치한 때가 없지 않아요. 시대가 바뀌면 변화를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낡은 사고로 일관할 때가 특히 그렇습니다. 자가용 운전만 해도 그렇잖아요. 바야흐로 남녀가 평등하게 경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성 운전자가 급속도로 늘었지요. 이렇게 시대가 변하면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 되는데,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가부장적인 남성 편력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거든요.
운전을 갓 배운 한 아주머니가 차를 몰고 가고 있었어요. 초보라서 운전이 느리고 서툴다 보니 그 뒤를 따르던 어떤 성질 급한 아저씨가 짜증이 난 거예요. 신호 대기 상황에서 차 옆으로 세우더니 차창을 열고 이렇게 외치는 겁니다.
“야 이 여편네야. 집에 가서 밥이나 해~!”
그러자 이 아주머니, 화가 단단히 나서 아저씨에게 한마디 했답니다.
“쌀 사러 간다, 이 자식아~!!”
이제는 남자들도 말을 조심해서 가려 해야 하는 시대예요. 여자라고 무시하고 어수룩하게 말 한 번 잘못했다가는 두 배로 당하게 되어 있거든요. ‘사람’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남자’네 ‘여자’네 하는 ‘분별’의 관점에서 보니까 꼭 이렇게 탈이 나는 겁니다. 분별심을 떠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기 앞가림의 기본이 아닐까요?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말씀에 귀 기울여 봅니다.
“무위법(無爲法)은 분별 조작 하나 없이 일[事]이 자연 이뤄짐을 말함이니 깨쳐 이치 알게 된다.”(‘실행론’ 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