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들여다보는 경전(6)

편집부   
입력 : 2017-11-27  | 수정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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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숙하게 사람을 교화하다

부처님은 지혜와 방편이 원만구족하신 분입니다. 원만(圓滿)이란 말은 완벽하다라는 뜻입니다. 구족(具足)이란 말은 갖추었다는 뜻이니 원만구족이란 ‘완벽하게 갖추었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방편을 완벽하게 다 갖추신 분입니다.

부처님이 지혜로운 분이라는 것은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중생구제를 위한 방편을 완벽하게 갖추었다는 말은 정확히 어떤 뜻일까요?

그 한 가지 예를 <출요경> 제12권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옛날 사위성에 최승(最勝)이라는 장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찌나 부자인지 코끼리와 말 같은 동물을 많이 거느렸고,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는 대단히 인색했습니다. 일단 자기 것이 된 재물은 절대로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게 했습니다.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 와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들이지 않았고, 행여 재산을 축낼까봐 문지기를 두었습니다. 대문을 일곱 겹으로 튼튼하게 만들고 빗장을 단단히 질러 놓았습니다.

행여 쥐가 드나들까 봐 담장에 석회를 발라 두었고, 새가 날아와서 낱알 하나라도 물어갈까 봐 그물로 온 집안을 덮었습니다. 곡식이 축날까봐 개도 기르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보시를 권하는 분입니다. 그리고 최승장자처럼 엄청난 자산가는 이웃에 보시를 해서 공덕을 쌓기에 가장 유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곡식 한 알에 벌벌 떠는 그를 보니 부처님은 안타깝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최승장자에게 가서 그의 인색한 마음을 부수고 보시하는 공덕을 쌓도록 인도하라고 일렀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그의 집을 찾아가서 보시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이런 말이 듣기 싫었습니다.

‘보시하라고? 쳇, 결국 내 재물이 탐나서 왔구먼. 나는 고타마 존자가 아는 것도 많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법문도 아주 다양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은 그 많은 가르침 중에서 물건을 내놓으라는 말만 들려주고 있다. 대체 이들은 수행자인가, 아니면 거지인가?’

최승장자는 식사 때가 지나기 전에 어디 가서 탁발이라도 하시라며 스님들을 내쫓고 문을 닫아 걸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최승장자에게서 한 모금의 물, 한 수저의 밥도 얻지 못했습니다.
“최승장자의 탐욕과 인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늘에 닿을 정도로 장작을 쌓고 불을 붙여 그의 마음을 녹인다 해도 그는 절대로 자신의 것을 다른 이에게 베풀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부처님께서 나서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신통력을 써서 한순간에 그의 집 뜰 한가운데에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란 장자는 이내 불쾌해졌습니다.

‘이젠 스승까지 찾아오게 만드는 구나. 또 무슨 말을 할지 들으나 마나 뻔하다. 내 것을 달라고 하겠지.’
부처님은 최승장자 짐작대로 ‘보시’를 말씀하셨습니다.
“장자여, 큰 공덕을 얻는 다섯 가지 보시가 있습니다.”
장자는 ‘역시나…’하는 생각에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여쭈었습니다.
“다섯 가지 보시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보시는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일입니다. 생명을 해치지 않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뭇 생명들을 잘 감싸주기 때문에 여린 생명들의 마음에서 두려움을 없애줍니다. 이것이 첫 번째 보시입니다.”
뜻밖의 말씀을 들은 장자는 놀랐습니다. 지금 네가 가진 것을 내놓으라는 법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말씀을 듣자 장자는 생각했습니다.

‘남을 해치는 사람은 가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부자다. 죽을 때까지 써도 남을 정도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니 재물 때문에 남을 해칠 일은 내게 없다. 그렇다면 나는 오래 전부터 첫 번째 보시를 해왔다는 말이 아닌가?’

장자는 이렇게 생각하자 즐거워졌습니다. 예전부터 수행자들은 자신이 인색하고 탐욕스럽다고 비난했는데 지금 부처님은 자신이 오래 전부터 남을 해치지 않는 보시라는 것을 실천해오고 있다고 은근히 일러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쁜 마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부처님. 앞으로도 저는 다른 생명을 절대로 해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보시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보시는 주지 않는 것은 갖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허락 없이 함부로 갖지 않고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면 저들이 당신에게서 안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보시입니다.”
장자는 또 생각했습니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이 남의 것을 함부로 빼앗는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마을에서 최고 부자다. 내가 이 많은 재물을 쌓아두고서 남의 것을 욕심낼 일이 뭐 있는가? 그렇다면 나는 오래 전부터 두 번째 보시를 실천해 왔다는 말 아닌가?’

부처님이 자신을 인정해주는 것만 같아서 즐거워진 장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 앞으로도 저는 남이 주지 않는 것을 함부로 갖지 않겠습니다.”
“세 번째 보시는 그릇된 이성 관계를 멈추는 일입니다. 네 번째 보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일입니다. 다섯 번째 보시는 술과 같이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것에 빠지지 않는 일입니다.”
장자는 생각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넘치도록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다른 이의 것을 탐하지 않았으며, 술이나 이성문제는 재물을 줄어들게 하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철저하게 금해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기쁨에 넘쳐 부처님에게 큰 소리로 맹세했습니다.

“부처님, 저는 그릇된 이성 관계를 가지지 않겠습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술과 같이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것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처님에게서 오계를 받았습니다. 부처님, 성자, 현자, 수행자는 고리타분하다며 처음부터 마음에 빗장을 질렀던 최승장자가 큰소리로 오계를 지키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출요경>제12권의 최승장자 이야기는 부처님의 교화방법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려 줍니다. 무엇인가를 소유한 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많이 가진 자일수록 더욱 더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마음이 강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중생의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덧없기 짝이 없는 불안한 인생, 무엇이든 움켜쥐고 쌓아두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색하고 탐욕스럽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것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라고 말하면 기쁘게 그에 따를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요?

부처님의 방식은 전혀 달랐습니다. 제 것을 움켜쥐고 있느라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 마음을 두드렸습니다.
‘당신은 이미 아는 새 모르는 새 선한 일을 해오고 있었다.’
물론 부처님은 그 탐욕스런 부자를 교화하기 위해 없는 말을 지어내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일깨워준 것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에 최승장자는 안심했고 행복해졌습니다. 자신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부처님이 권하는 보시라는 것을 이미 해오고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닫고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너는 못됐다. 악한 사람이다. 그렇게 살면 벌을 받는다. 죽으면 지옥 간다’라는 말만 들으며 살아왔는데 자신이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뿌듯하고 즐거워질까요?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선업을 짓습니다. 경전을 보면 그래서 ‘환희봉행’이라는 말이 그리도 자주 등장합니다. 환희에 가득 찬 사람만이 부처님이 권하는 선업과 수행을 받들어 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최승장자에게서 바란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마침내 최승장자의 인색하고 각박한 마음이 부드럽게 녹아내렸습니다.
‘내게 좋은 말씀을 들려주신 부처님께 품질 좋은 천을 공양 올려야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에게 무엇인가를 베풀려는 마음을 냈습니다. 그는 기쁨에 차서 보물창고로 달려갔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옷감을 보자 그의 마음은 다시 인색해졌습니다. 아끼려는 마음과 베풀려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켰지만 그는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옷감을 꺼내어 부처님께 올렸습니다. 부처님은 그에게서 공양을 받고 나서 보시하고 계율을 지키면 선업을 짓는 일이요,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반드시 따르며, 탐욕은 더럽고 번뇌는 커다란 근심만을 불러일으킨다는 법문을 들려주었습니다.

법문을 듣고 난 최승장자의 마음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웃을 향해 굳게 닫혀 있던 창고의 문도 활짝 열렸습니다.

교화의 대상자를 조금도 마음 상하게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업을 향해 발을 내딛게 하는 것, 그래서 부처님의 중생교화를 선교방편(善巧方便) 즉 방편이 매우 능숙하고 오묘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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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령/불교방송 FM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