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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일까

편집부   
입력 : 2017-11-27  | 수정 :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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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얘 두 시간만 봐주세요. 급한 볼일이 있어서요. 얌전히 있으라고 단단히 일러 놓았으니 말썽부리지 않을 겁니다. 목욕시키고 화장실도 다녀왔어요. 간식만 주시면 돼요.” 

혼자 자취를 하는 아이 친구가 녀석을 맡기고 선걸음에 돌아선다. 싫다 좋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동생처럼 끼고 다니며 좀처럼 남에게 맡기지 않는지라 조심스럽다. 가끔씩 집에 데려 오면 무릎에 앉혀놓고 만져주고 눈 맞추며 동생이 아니라 아빠가 아이를 돌보는 것 같았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녀석과 마주 앉는다.
“형한테 주의 사항 잘 들었지. 미안하지만 난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형의 부탁이라 할 수 없이 들어 주는 거야.”

녀석은 눈도 맞추지 않고 구석에 앉아 제 옷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단둘의 만남은 처음인데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 저러는 걸 보면 어디 불편한가. 아무리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대 놓고 속내를 보인 게 걸려 옷을 벗겨놓고 몸을 살핀다. 별 이상이 없는 걸 보니 옷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녀석의 표정이 금방 환해진다.

첫인사를 제대로 나누지 못한 걸 만회라도 하려는 듯 쫄랑쫄랑 따라다니며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진다. 소파에 앉자 허락도 없이 무릎에 올라와 꼬리를 흔든다. 스킨십까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제법 넉살이 좋다. 내려놓으면 또 기어올라 제 얼굴을 턱밑에 내민다. 눈망울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래도 내칠 거냐고 살가운 마음을 보인다. 안아주지 않으면 왠지 나쁜 사람이 될 것 같아 슬며시 팔을 벌린다. 녀석의 애교가 내 마음을 녹여 버렸다. 한 보따리 들고 온 장난감을 풀어 놓으니 잘도 논다. 혼자 내버려 두자니 신경이 쓰여 아기 보듯 중얼거리며 같이 놀아준다. 공 던지기도 하고 링 돌리기도 한다. 참, 간식 주라고 했지. 가방을 뒤져 먹을 걸 주니 벌렁 드러누워 온몸으로 고마움을 표한다. 귀여운 짓 할 때 사진을 몇 컷 찍었다. 아이 친구가 돌아오면 보여줄 요량으로. 첫 마음과는 달리 이왕 봐 주는 거 인사를 듣고 싶다.
어느새 시간이 후딱 지났나 보다. 현관 벨 소리에 녀석이 먼저 달려 나간다.

“어머님, 얘 옷 벗겨 놓으면 어떡해요. 미리 말씀드린다는 걸 깜박했네요. 제가 곧 방학하면 외지에 있는 동물병원으로 실습을 가야 하거든요. 맡길 때가 없어서 병원 근처 유치원에 보내기로 했어요. 그곳 애들은 멋쟁인데 얘는 멋은 고사하고 옷을 입어본 적이 없어 뭘 걸치는 걸 싫어해요. 그래서 버릇들이려고 일부러 입혀 놓은 거예요. 제가 나가자마자 눈치 빠른 녀석이 낑낑대며 시위를 했나 보군요. 어머님께서 손님 대접을 해 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거죠.”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불편해하기에 벗겨 줬지. 낯선 집에 맡겨진 것이 불쌍해 기분 좋게 해 주려고 살피다 보니 그렇게 돼버렸어. 좀 못나 보이면 어떠냐. 녀석이 편하면 그만이지.”

“제가 바빠서 그냥 두었더니 습관이 됐나 봐요. 제 잘못도 있지만 낯선 곳에 벌거벗은 채로 데리고 갈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도 새로운 곳에 적응을 잘할까 걱정인데 모습까지 초라하면 왕따 당해요. 제가 돌볼 수 없으니 유치원에 정 붙여야 하거든요.”
녀석은 벌써 사태를 짐작했는지 제 옷을 입에 물고 내 앞에 갖다 놓는다. 눈을 내리깔고 납작 엎드린다. 꼭 꾸중 듣는 아이 같다.

“형이 옷을 입어야 한데. 불편해도 좀 참아. 그곳 친구들은 멋지게 꾸미고 다닌다고 하잖아. 너만 알몸이면 창피하지 않겠니. 너 잘 봐주고 난 이 꼴이 뭐야. 칭찬 들으려 했는데 되레 꾸중을 들었으니 네가 책임져라”
녀석은 풀이 죽어 고분고분 몸을 내어준다. 내가 키울 것도 아니니 우길 수가 없다. 언제부터 개가 옷을 입고 다녔다고 이 난린가. 밤낮으로 끼고 다니며 예뻐 할 때는 언제고 불편해 하는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그 심사는 무엇인가. 상대가 아닌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진정한 사랑일까.

백승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