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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외침

편집부   
입력 : 2017-09-29  | 수정 : 2017-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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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집도 아니면서 제멋대로다. 나는 나대로의 특성이 있건만 말이 없으니 무시하는 것일까. 힘이 없다고 얕보는 것일까. 징징 대며 우는 아이보다 속으로 삼키며 참는 아이가 큰일 낸다는 걸 모르는 것인가. 대항하지 않는다고 멋대로 했다가 나중에 그 대가를 무슨 수로 받을 작정인지 모르겠다. 이런 상태로 나간다면 눈감아 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 내가 참아 준다손 치더라도 하늘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마구잡이로 깎아내고 쇠막대기를 박고 콘크리트를 입히니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다. 안전을 위해 필요한 곳이야 어쩔 수 없지만 장식품을 달듯 곳곳에 손을 댄다. 운동 기구도 그렇다. 한두 군데 설치하는 건 어떠랴. 이런저런 이유로 정상까지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이용 할 수도 있고 자투리 시간에 잠시 요긴하게 쓸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입구에서부터 중턱, 꼭대기 등 군데군데 버티고 있다. 산인지 헬스장인지 혼란스럽다. 나의 본 모습을 즐기고 느낄 수는 없을까.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이 불감당이다.

설치비용도 만만찮을 텐데 그걸 유익한 곳에 쓰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부터 신중하게 적당한 장소에 설치하면 좋으련만. 멀쩡한 걸 없앴다가 옮겼다가 난리다. 남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다. 자기들은 사소한 일에도 전문가를 찾으면서 내 집에선 주먹구구식이다. 땅을 파헤칠 때마다 땅속 식구들은 물론이고 풀꽃들이 자취를 감춘다. 요란한 소리에 새나 다람쥐 등 동물들의 정신적 충격도 생각해 줘야 되지 않을까. 내가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공들여 가꾸는 이도 있지만 짓밟는 사람이 더 많으니 이러다 본 모습을 잃어버릴까봐 불안하다.

내 집에 오는 사람들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뜨거운 태양과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어 멋진 환경을 만들어 놓았건만 거들떠보지 않는다. 집 구경은 뒷전이고 시끄럽게 떠들며 자기들 소리에 빠져있다. 라디오, 음악 소리가 뒤섞여 도심을 방불케 한다. 이어폰으로 조용히 혼자만 듣는 예의쯤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산 식구들의 소리가 그대들 몸과 마음의 영양제가 될 텐데 그 소리를 무시하면서 왜 내 집에 오는지 묻고 싶다. 예의를 팽개친 모습이 안타깝다. 나는 누군가 지켜주지 않으면 스스로 지킬 수가 없다. 물론 지키지 않아 생기는 대가를 내가 막을 수도 없다.’

집 앞 산에 자주 간다. 이십여 년 전 이 동네에 이사 오면서 산을 보고 반해 다른 건 따지지도 않고 결정했다. 가까운 곳에 내 집 정원 같은 산이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바라보기만 해도 푸근하다. 나지막하지만 제법 높낮이가 있어 운동하기에 적당하다. 어른은 어른대로 땀을 흘릴 수 있고 아이와 노인은 산 둘레를 돌며 가볍게 몸을 풀 수 있다. 유치원 아이들의 야외 학습장으로도 그만이다.

특히 여름엔 책을 한아름 안고 아이들과 그늘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졌다. 그늘이 두꺼워 산림욕을 겸한 멋진 피서였다. 새들의 지저귐이 시원한 바람을 타고 기웃거리면 아이들은 책을 읽다 말고 소리의 정체를 찾느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지치면 까무룩 잠에 빠지기도 했다. 그런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건만 산은 성장은커녕 뒷걸음질이다. 어디 하루아침에 원상 복구가 되는 일인가. 나무를 키우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사라진 동물은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산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며칠 전 찍은 딱따구리 사진을 본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한낮이다. 쉬엄쉬엄 걷는데 평소에 듣지 못한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 보니 나무꼭대기에 오색딱따구리가 있었다. 딱따구리든 뭐든 산에서 새를 본 지가 언제였던가. 다행이 녀석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나무를 쪼며 연신 벌레를 잡았다. 행여 날아갈세라 숨죽이며 쳐다보았다. 환경이 불편하더라도 이 숲에서 살아남아 가정을 꾸리기를 빌며 휴대폰에 담아온 것이다. 딱따구리를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또 산을 찾을 것이다. 딱따구리가 많은 사람 눈에 띄어 반성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백승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