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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 마다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모든 곳이 참되다

편집부   
입력 : 2017-08-14  | 수정 :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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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들은 인디언들이나 남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원주민들이 선물(은혜)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음을 연구를 통해 밝힌 바 있다. 트로브리안드 원주민들은 선물을 돌려주어야 할 대상에 주목한다. 내가 A에게 선물을 받으면 A에게 갚는 게 아니라, 다른 이웃인 B에게 갚는 방식이다. 우리가 받은 선물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위에서’ 받은 것은 ‘아래로’, 부모는 자녀에게로, 교사는 학생에게로, 선배는 후배에게로 당대에서 후대로 흘러가는 은혜 갚음의 법칙이다. 모두가 은혜를 갚았고, 한편으론 모두가 은혜를 입은 것이다.

북미대륙 북서부 인디언의 유명한 선물 게임인 ‘포틀래치’만 보더라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게임의 방식은 선물을 받으면 받은 선물보다 더 많은 선물로 보답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더 많은 선물로 보답하지 않으면 결국 지는 게임이다. 최종적인 승자는 남들이 갚을 수 없을 정도의 선물을 주는 사람이다. 이 승자의 대부분은 부족의 추장이며, 되짚어 생각해 보면 추장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모든 것을 헌신하는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봉사하는 삶일 것이다. 어찌 이것뿐 이겠는가. 매일 아침 숨 쉬는 공기, 육대(지, 수, 화, 풍, 공, 식)가 생명에게 베푸는 고마움이 그러하고, 부처님과 부모님의 은혜는 가히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고 절대적이다.

사상가이자 생태학자인 이반 일리치는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지 못하는 삶은 결코 성공한 삶이 아니다”라고 말한바 있다. 회당 대종사께서는 “은혜는 평생으로 잊지 말고 수원은 일시라도 두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속담에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정반대로 잊지 말아야 할 은혜는 늘 잊어버리고, 잊어야 할 원수는 가슴에 새기고 새겨 타자에게는 물론 자신도 황폐화시키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교화의 현장에서 가끔 나는 주어진 것이 다 은혜가 아님이 없음을 뼈저리게 경험할 때가 참으로 많다. 함이 없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내는 보살님들의 보살행에서 이 찜통의 폭염 속에서도 복 밭을 일군다는 일념 하나로 비지땀을 흘리며 심인당(법당)을 분양받아 묵은 때를 닦듯 마음도 닦아 간다. 금생과 다음 생이 복지구족하기를 간절히 서원하면서.... 이처럼 늘 은혜 가운데 살고 있으며, 한 톨의 쌀이 생산되기까지 하늘과 땅과 바람과 농부의 수고로움이 없었더라면 이 고마운 공양들을 어찌 받을 수 있었겠는가. 저 높고 눈부신 시(詩) 짓기에서부터 저 깊고 거룩한 공양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은혜 속에서 오직 깨달음을 이루고자 정진할 때만이 이 공양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감사함 보다는 비난과 질책과 원망이 팽배하다. 폴 고갱의 작품인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제목을 가진 고갱의 이 그림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더 크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은혜를 입으며 여기까지 무탈하게 주인공으로 살아 왔음을 인식한다면 최소한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존재는 거슬러 올라가 보면 150억 년이라는 우주의 시원과 연결되어 있고, 나의 부모,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까지 거슬러 올라가 현생 인류의 조상에서 나에 이르기까지 한 뿌리에서 태어나 부모 아닌 사람이 없다. 임제 의현선사의 “가는 곳 마다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서 있는 모든 곳이 참되다.(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임제록’에 수록되어 있는 말씀은 그래서 더 경이롭게 다가온다.

수진주 전수/정정심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