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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풍경

편집부   
입력 : 2017-08-14  | 수정 : 2017-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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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에 근무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으리라 덮어 두기엔 당황스러운 때도 있지만 따뜻한 마음을 나눌 때도 있다. 정이 오갈 땐 처음 보는 사람도 친근감이 느껴진다.

#1 나
화장실 세면대에서 할머니가 수돗물을 튼다. 거울을 보며 구석구석 얼굴을 살피더니 무얼 찾는지 가방을 한참 뒤적인다. 물은 저 혼자 흐르고 할머니는 계속 딴전을 피운다.  옆 사람이 쳐다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없이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수도꼭지를 잠근다.
“별 여편네 다 보겠네. 손 씻으려는데 물은 왜 잠그느냐고. 저나 잘할 것이지 웬 참견이야. 남이야 뭐를 하든 내 맘이지. 그까짓 물 좀 틀어 놓으면 어때서. 물 값이 몇 푼이나 한다고 난리야. 재수 없게.”
“할머니,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일이죠. 이게 할머니 소유물은 아니잖아요. 소유물이라도 그렇지. 온 나라가 가뭄으로 난린데 이러시면 곤란하죠.”
할머니의 큰 소리에 아주머니도 물러서지 않고 되받는다. 콸콸 흐르는 물소리도 한몫 거든다. 주거니 받거니 입씨름을 하다말고 아주머니가 나가 버린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할머니가 감당되지 않는 모양이다.  입구에 할머니 키보다 더 큰 짐이 할머니를 기다린다. 빈 상자를 납작하게 접어 반듯하고 여무지게 묶었다. 굴려도 흩어지지 않겠다. 조금 전의 행동과 짐을 묶은 솜씨가 한 사람이 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2 너
한 아주머니가 역무실로 급히 들어온다.
“화장실 변기에 물이 계속 흘러요. 빨리 좀 가보세요.”
물 내리는 레버가 고장이다. 물을 잠그고 사용 금지를 써 붙인다. 여느 때처럼 화장실을 둘러보니 검은 비닐봉지가 세면대에 놓여있다. 지갑과 나물 생선 등이 들어있다. 누군가 시장 본 걸 깜빡했나 보다. 연락처를 알 길 없다. 역무실 입구 잘 보이는 곳에 내용물을 보이게 펼쳐둔다. 혹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몰라 찾으러 오지 못할 경우도 있으니까. 두어 시간 지났을까. 조금 전 화장실 변기가 고장 났다고 신고 한 그분이 역무실 문을 두드린다.
“뭔가 허전하다 했더니 집에 가서 보니 보따리를 두고 왔지 뭐예요. 물이 어찌나 많이 새던지 빨리 신고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손을 든 걸 잊어버리고 말았네요. 지갑에 현금이 들어 있어서 걱정하며 달려왔거든요. 찾아 줘서 고마워요.”
아주머니 목소리가 향기처럼 퍼진다.

#3 우리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직원들이 현장으로 간 사이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할머니가 벨을 누른다. 짐이 무겁다며 도와 달라고 한다. 사무실을 비울 수 없어 직원이 올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하니 마침 이 광경을 본 아주머니가 도와주겠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양손에 들고 있던  여러 개의 봉지를 재바르게 한곳으로 합쳐 가방에 넣는다. 짐이 많은 것 같은데 괜찮겠느냐고 여쭈었다.
“부피만 크지 무겁지는 않아요. 이런 건 서로 도울 수 있는 일이지요. 옛날 같으면 동네 어른도 내 부모인 듯했는데 요즘은 세상인심이 야박해서 자기밖에 모르니 문제지요. 그런 분위가 탓에 도움을 주겠다고 선뜻 나서기도 쉽지 않아요. 친절한 가장한 범죄도 생기니 오해 받을 수도 있고요. 걱정하지 말고 다른 일 보세요.”
감사 인사를 드릴 틈도 없이 아주머니가 할머니 짐을 들고 계단으로 내려간다. 주인과 손님이 뒤바뀐 느낌이지만 그런들 어떠랴. 할머니를 모시고 열차를 타는 모습이 모녀 같다.

어차피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나와  너 사이에 벽을 만들기보다 ‘우리’라는 다리를 놓으면 어떨까. 미국의 페미니스트 정치 활동가이자 교수이며 작가인 안젤라 데이비스의 말을 곱씹어 본다. ‘잊지 마라. 담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

백승분/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