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 알기쉬운 교리문답 56

편집부   
입력 : 2017-07-31  | 수정 : 201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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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 중에 마음에 불평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요?

누구를 가까이 하고, 누구를 멘토로 삼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인생이 펼쳐질 수 있습니다. 우리 진언행자들은 법신부처님을 내 인생의 체(體)로 삼아서 당체법문을 깨달아 참회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가 간절하고 절박하게 염송하고 서원하는데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이루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좀처럼 비로자나부처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시는데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홍수가 났습니다. 보트에 타라는 구조대의 다급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한 각자님은 ‘부처님이 나를 구해주실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염송만 했습니다. 이번에는 헬리곱터가 긴 사다리를 내려줬지만 역시 부처님의 도움을 기다리겠다고 만류했다가 결국 죽고 말았어요. 각자님은 저승에 가서도 부처님을 원망했습니다.
“왜 저를 구해주지 않으셨나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배도 보내주고 헬리곱터까지 보내줬는데 네가 타지 않는 걸 어쩌란 말이냐?!”

혹시라도 우리 진언행자들의 신행이 이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스스로 꼼짝하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의 도움조차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립니다. 은혜 속에 살면서도 치심(癡心)에 사로잡혀 불평・불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인생을 지혜롭게 살고 있지 못한 거예요.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고, 내 인생을 남의 인생과 저울질하면서 진리에 등을 돌리는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 인연을 짓는 것이겠습니까? 

장자의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를 잘 아실 겁니다. 사육사가 원숭이에게 도토리를 먹이로 줄 때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를 주든,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주든 어차피 그 합은 일곱 개로 같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왜 세 개냐?” 또는 “왜 네 개냐?”를 따지며 ‘조삼(朝三)’과 ‘조사(朝四)’ 사이에서 핏대를 올리고 옥신각신하기 일쑤거든요.

그러나 정작 우리의 인생을 마지막으로 결산해 보면 결국 ‘얻은 것과 잃은 것의 합은 같다’고 합니다. 초반에 잘 나가던 사람은 인생 후반으로 갈수록 무너지는 경우가 많고, 한 곳에서 손해가 난 사람은 다른 곳에서 그 이익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의 인생의 합은 제로라고 하는 겁니다.

내 인생에 너무 의미부여를 하려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가 성공해야 된다는 강박감에서 조금은 벗어나야 합니다. 너무 잘 하려고 하면 쉽게 지치고 일을 그르치기 쉽거든요. 지금 슬슬 내려가는 것은 나중에 올라가려 하는 징조일 수 있습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타인과 자꾸 트러블이 생길 때 차별희사를 실천하여 상대의 허물을 보고 내 허물을 깨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수행이 없을 겁니다.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수행지침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삼밀(三密)로써 내 마음에 항상 인(印)을 새겨 가져 실상같이 자심(自心) 알아 내 잘못을 깨달아서 지심(至心)으로 참회하고 실천함이 정도(正道)니라.”(‘실행론’ 3-2-1 ‘심인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