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46

편집부   
입력 : 2017-07-03  | 수정 :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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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신성불

현신성불

“불교의 목적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첫째는 미혹(迷惑)을 전환하여 각성(覺性)을 열고, 둘째는 생사의 괴로움[苦]을 해탈하여 열반의 즐거움[樂]을 얻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범부중생이 부처를 이룬다는 것이 주안(主眼)이다. 그러나 범부가 성불하는데 있어서 현교는 발심으로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삼대무수겁(三大無數劫)이 걸리지만 밀교는 현재의 몸[現身]으로 이곳에서 성불할 수 있으니 곧 일생성불(一生成佛)이며 현신성불(現身成佛)인 것이다. 오 분 행하면 오 분의 성불이며 십 분 행하면 십 분 성불이며 한 시간 행하면 한 시간 성불인 것이다.”(‘실행론’ 제3편 제4장 제18절)

부처가 되는 길

터널처럼 보였다. 그렇게 보인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터널처럼 생긴 구조물이었다. 입구만 보일 뿐 출구너머 뒤쪽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시커먼 장막으로 철저하게 가려놓은 듯 싶었다. 작은 틈새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상상은 더더욱 할 수 없었다. 어릴 때 시장판에서 약을 파는 장면을 몰래 엿보다가 들킨 뒤 ‘알면 다친다’며 어린애들은 접근조차 하지 못하게 했던 약장수가 생각났다. 무시무시한 음모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장을 보는 느낌이기도 했다.

터널 옆쪽과 위쪽은 살벌하게 여겨질 정도로 온갖 도구들을 동원해 장식해 놓고 있었다. 뾰족뾰족한 것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것은 기본이었다. 뾰족뾰족한 기구 주변으로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생긴 것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쇠줄이 얼키설키 엉겨붙어 있고, 바늘 하나 빠져나갈 틈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그물 망이 덧씌워져 있었다. 그물 망은 보이는 대로 생각한 표현일 뿐 사실상 틈새를 막아 놓은 견고한 장벽에 다름 아니었다. 물줄기는커녕 바람조차 넘나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치밀하고도 견고하게 막아 놓은 상태였다.

터널 앞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서거니, 앉거니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한결같이 행색은 초라하고, 몰골은 형편없었다. 모두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지고 온 나이테와도 같은 흔적은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터널을 통과하기 위해 초조하게 대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은 누가 보아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 순간이나 과정을 회피하거나 거역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형색은 비슷해도 여유 있는 얼굴을 한 이들이 드문드문 끼여 있는가 하면 잔뜩 겁에 질려서 죽을상을 하고 있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들이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싶었다. 저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이력이 다른 탓이다.

통과의례를 따라야 한다. 터널이 개방되면, 일정한 연령에 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터널을 통과해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 나라의 법이다. 터널 입구에 게시돼 있는 문구다.

“그대는 왜 그리 죽을상을 하고 있소? 옆에는 노모이신가? 에이, 노모를 잘 못 모셨구먼…….”
"그렇습니다. 저는 모친을 모시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만 어머님이 좋아하실 곳을 찾아다니면서 놀기만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아하실 곳을 찾아서 놀러 다니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가는 곳곳마다 있는 좋은 음식은 한 번도 사다드린 적이 없습니다. 한사코 마다하시는 어머님의 말을 좇아서 그랬습니다. 어머님께서 원하시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어머님의 뜻을 그슬려서라도 좋은 음식을 대접했어야 하는데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어머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으려고 너무나도 나태하게 대처했던 내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후회할 일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가 집으로 들어와서는 피곤해서 잠시 누워 있을 때 어머님이 심지어 저의 양말을 벗기고 발을 닦아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역정을 내시면서 억지로 제 발을 씻겨주시겠다고 하시는데 더 이상 뿌리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던 제가 한심스럽습니다. 이 세상 어느 자식이 감히 노모가 씻겨주도록 발을 내맡기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천하에 이 보다 더 나쁜 자식이 또 없을 것입니다. 때로는 어머님께서 밥을 떠 먹여 준 적도 있었습니다. 다 큰자식을, 그것도 노모를 업고 세상 유람을 하러 다니던 때에 어머님께서는 그곳에서 옛날 갓난아기 때의 제가 생각난다면서 밥숟가락을 빼앗아 밥을 떠 먹여 주기까지 했습니다. 추억이 그립다면서 막무가내로 그렇게 하시는데……. 그 때도 차마 저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어머님의 뜻대로 따르기만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후회막급입니다. 이 일 외에도 어머님을 모시고 살면서 잘못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바지게로 져다 날라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쯧쯧……. 왜 그랬소? 놀러 다니기만 하지말고 부처님 전에 공양을 하고 절을 하면서 빌기를 했어야지, 이를 어쩐다…….”

“그러게 말입니다. 지난 세월이 한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겠습니다. 지금 와서 후회한들 무엇하겠습니까만, 나으리 달리 방법이 없을까요?”
“쯧쯧…….”
“나리께서는 부처님 전에서 공부를 많이 하신 듯 합니다. 얼굴이 편안해 보이고 근심걱정 하나 없어 보입니다. 참으로 좋으시겠습니다.”
“나야, 뭐, 그렇지. 늘 토굴에 앉아서 부처 되는 공부만 했으니까……. 걱정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러시군요. 부럽습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댁이 어머님을 핑계삼아 산천유람을 나다닐 때 더우나 추우나, 밤이 짧으나 기나,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눈 팔지 않고 부처님공부만 했지 않았겠나. 도를 닦아서 부처가 되려고 그토록 열심히 수행하고 정진했으니 뭐 두려울 것도 없고 걱정될 일도 하나 없구려. 이 터널만 빠져나가면 나를 더 이상은 볼 수조차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오. 그러니 잘 봐 두시오. 허허허.”

“어찌하면 그렇게 살아올 수가 있습니까? 참으로 대단한 복을 타고 나셨는가 봅니다. 부럽기 그지없습니다."
"다 인연인 게지."
"그렇다면 부처님은 보셨습니까?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는지요? 부처님이 되시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더 이상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지요?”
“…….”
“그게. 참. 부처님 전에서 불공을 하고 공부를 한다고 해서 누구나 다 부처님을 보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구려. 그렇게 금새 부처를 보고 부처가 된다면 누가 그 짓을 안 하겠소.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구장창 앉아서 시늉만 내는 게지. 참으로 부처를 보고 부처가 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나 또한 아직은…….”
“부모보다 좋은 의복 입으려고 하지 말며/부모보다 좋은 음식 먹으려고 하지 말며/부모보다 높은 말로 거슬려서 하지 말라.” ‘아속달경’에 있는 말이었다. 집에 있는 부처, 곧 부모를 잘 모시고 효도하는 근본을 설한 부처님의 말씀이다.
터널이 개방되면서 이 말이 노랫소리처럼 큰 울림으로 스피커를 통해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늘 토굴에 앉아서 부처 되는 공부만 했다는 그 나리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자취를 감추었는지 더 이상 보이질 않았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