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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추고 낮추고 또 낮추어야

편집부   
입력 : 2017-06-20  | 수정 : 2017-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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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 가면 절 수행을 가르칩니다. 절에 가면 문자 그대로 절하는 것으로 시작해 절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절 수행을 통하여 참회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굽히면 굽힐수록 자신의 업장이 닦여지고 낮추면 낮출수록 높아지는 이치를 가르칩니다.

백팔 배, 천 배, 삼천 배를 하면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는 공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지복이 깃들며 무량한 가피력이 주어진다고 가르칩니다.

진각종 심인당에서는 삼밀수행을 통하여 참회공부를 합니다. 심인당에서의 불사의식은 참회로 시작해서 참회로 끝을 맺습니다. 이렇듯 참회가 심공[마음공부]의 근간입니다.

배추가 소금에 절여 숨이 적당히 죽어야지 맛난 김치가 되듯이, 진각종의 진언행자들은 불사의식을 통해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죽여갑니다. 맛난 사람이 되어갑니다. ‘내 허물이 무엇일까?’를 화두로 삼아, 늘 참회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 세상은 모두가 다 잘난 맛에 사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이 높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을 낮춰야지만 자신이 높이 되는 줄 압니다. 그렇기에 자기를 낮추고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남을 높이는 것이 나를 높이는 것이고 남을 해치는 것이 나를 해치는 것임을 모릅니다. 나를 버려야 부처와 하나 되는 이치를 모릅니다. 우리는 낮출 줄 모르기에 버릴 줄 모르기에 부처님과 나의 인연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나를 낮추면 낮출수록 부처님과 나의 거리는 가까워집니다. 부처님의 세계에 입성하고 부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나를 낮춘다는 것은 나를 버린다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 무아(無我)의 실천이고 공(空)의 체득(體得)입니다. 한편 회당 대종사는 무아의 구체적인 실천법으로 사상(四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의 사상(四相)을 없애고 행복으로 나가려는 서원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我]를 내려놓음으로써 탐하고 아끼고 성내는 마음을 없애고 일체중생에게 희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아상은 유세하는 것이고 인상은 사람답지 않다고 천대하는 것이고, 중생상은 좋은 것을 내가 하고 나쁜 것을 남에게 미루는 것이고, 수자상은 분별 차별하는 것이다.”(실행론 3-13-1) 이처럼 진리는 설명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실행되기 위한 것이기에 무엇을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회당 대종사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행도 그 해답은 자신의 마음정화입니다. 즉 자기정화에 연결되어 있고 항상 자기정화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진각종 심인당은 정신정화의 전당입니다. 심인당은 천차만별로 오염되고 병들어 있는 인간의 마음병을 고치는 정신정화의 전당입니다. 그래서 심인전당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절은 보이는 등상불로 안 보이는 것을 제도하는 곳이라면 심인당에서는 무상을 다스려서 현실을 구제하는 곳입니다.

이처럼 자기정화를 바탕으로 한 참회공부를 통하여 진각종 진언행자는 늘 자신을 낮추어 갑니다. 쉼 없이 한발 한발 내려가는 정진을 통하여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해인(海印)]에 이르고자 합니다. 이것은 흐르는 물이 부단히 낮은 곳을 향해 흘러 큰 바다에 이르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내려가는 방향의 에스컬레이터에 우리 몸을 실어야 할 텐데, 우리의 모습은 올라오는 방향의 반대 방향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한발 한발 정진해 나아가는데도 중생심이 발동하면 다시금 어느 덧 내려간 만큼 불쑥 올라오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현듯 불쑥불쑥 올라오는 이러한 중생심 때문에 내려가고자 하여도 늘 제자리걸음이기도 합니다. 행여나 잠시 쉬고 있노라면 오히려 내 마음공부는 발전은커녕 퇴보되고 맙니다.

흐르는 물처럼 쉼 없이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한발 한발 나아가야 부처님의 바다에 이를 수 있습니다. 중생심을 뛰어넘는 수행 정진과 무식(無息)한 실천의 힘만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과 나와의 거리를 점점 좁혀갈 수 있습니다. 해인에 이를 수 있습니다.

보성 정사/시경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