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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高)차원의 세계로 고(Go)

편집부   
입력 : 2017-05-01  | 수정 : 201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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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신나게 하루를 함께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어지자 메뚜기가 말했습니다. “하루살이야, 우리 내일 다시 만나 놀자.” 하루살이가 대답했습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의 삶에는 내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어느 날 메뚜기가 개구리와 친구가 되어 한 여름을 재미나게 보냈습니다. 날씨가 쌀쌀해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얘기했습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 놀자.” 메뚜기가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그렇습니다. 메뚜기는 한 철만 삽니다. 메뚜기의 차원에서는 내년을 산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잘 알려진 우화 같은 얘기지만 의미심장합니다. 차원이 달라 서로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차원이 낮은 무명 중생들은 차원이 높은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비가 오면 땅밖으로 지렁이가 많이 기어 나옵니다. 그 중 많은 지렁이는 땅속으로 못 들어가고 햇볕에 노출되어 말라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온 뒤에 날이 개었는데도 지렁이는 햇볕이 없는 곳으로 물기가 있는 수풀 속으로 기어가지 않고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자꾸 햇볕이 내리쬐는 마른 땅으로 기어갑니다. 죽을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안타깝지만 지렁이의 차원은 그렇습니다. 관찰하는 사람에게는 지렁이의 운명이 눈에 보이지만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차원은 어떠할까요? 다른 뭇 중생들 보다는 고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 가장 뛰어나 영묘한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다고 볼 수 있을까요? 깨달음의 세계에서 바라다볼 수 있다면, 부처님의 차원에서 내려다보면, 우리 인간들은 하루살이에 불과하고 메뚜기에 불과하고 지렁이와 다름없을 것입니다. 차원이 다른 세계를 알지 못하고 죽을 줄도 모르고 부여잡고 놓지 못하고 집착해서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울 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각의 틀과 자기감정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생각과 감정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며 억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고 억압해서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교도소라는 공간에서 태어나 교도소라는 세상에서만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곳이 자유가 억압된 곳이고 속박된 고통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치와 같습니다. 교도소 담장 밖의 대자유의 세상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의 세상살이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깨닫지 못한 우리의 차원이 그렇습니다. 내 생각과 내 감정, 나(我)라는 감옥의 세계에 갇혀, 나(我)라는 세계를 넘어서지 못하여 구속과 억압, 분노로 얼룩진 고통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내 생각이 옳다는 집착이나 상대와의 감정싸움이 고무줄 끈을 부여잡고 스스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고는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을 상대나 환경에게 돌려버립니다. 그 고무줄 끈을 애초에 잡지 않던지, 잡았더라도 내가 먼저 놓아버리면 되는데, 그러면 대자유인인 되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 생각과 감정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도소 담장 밖의 세계로 나아가야합니다. 나(我)라는 감옥 담장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뛰어 넘으면 차원이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이것은 윤회의 세계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대자유의 세계이고 해탈의 세계이며 차원이 다른 새로운 세계입니다. 참 보살(菩薩)의 눈으로 참 각자(覺者)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차원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려놓는 연습(렛잇비–let it be)과 놓아버리는 연습(렛잇고–let it go)으로 구속과 속박, 분노, 고통의 세상을 대자유의 세상으로 만들어 내겠습니다. 차원이 다른 삶으로 나아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