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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44

편집부   
입력 : 2017-04-14  | 수정 : 201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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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정진

"용맹을 일으키려면 일주일 불공을 정하여 시종여일(始終如一)해야 한다. 그러면 세간에서도 모든 일에 게으르지 않게 된다. 아홉 길의 성(城)을 쌓자면 마지막 한 소쿠리의 흙을 얹어야 되는데 얹지 못하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용맹을 세워서 전진을 못하면 옳은 실천이 안 된다."('실행론' 제3편 제4장 제12절 나)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이질적이었다. 동서양을 구분 짓는 경계의 이질감 같이 낮선 것도 아니고, 과거는 물론 미래에도 경험해 보지 못했거나 못할 것 같은 세대적으로 동떨어진 듯한 시대적 이질감도 아닌 것이 분명한, 이상한 것이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고, 말로는 더더욱 형언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애매한 자극적인 냄새에 이끌려 깊숙이 들어갔다.
미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현주 앞에 거대한 벽이 나타났다. 책으로 장식된 책꽂이처럼 생긴 벽이었다. 더 이상은 접근할 수 없다는 표시이기라도 하듯 벽은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먼지가 더께 앉아 있고 곳곳이 낡아 보여 손이라도 갖다 대면 금새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허물어져버릴 것 같기도 했다. 숨조차 크게 내쉴 수 없었다. 현주는 벽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뒤를 돌아보았다. 동굴 안은 컴컴했다.
컴컴한 동굴 안을 서둘러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다지 무섭다거나 두려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야릇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무엇에 이끌려 동굴 안을 찾게 됐는지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마음뿐이었다. 현주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한 손으로 벽을 밀어 보았다. 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밀어보았다. 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튼튼한 듯 했다. 오기가 발동했다. 현주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가 온몸으로 부딪혀 보기로 했다. 하나, 둘, 셋, 걸음을 뒤로 옮기는데 느닷없이 벽이 허물어져 내렸다. 그 바람에 현주가 소스라치게 놀라기는 했지만 세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던 탓에 파편들에 맞거나 다치지는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든 것은 또 잠시 뿐이었다. 워낙 오래되고 낡아서 보기에 따라 스치는 바람에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던 벽이었던지라 더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허물어진 벽 뒤는 광장이었다. 아니 차라리 도서관이라고 해야 옳을 듯 싶기도 했다. 촘촘히 얽히고 설킨 서가에 빼곡이 책이 꼽혀 있었다. 서가는 물론 책까지 죄다 먼지를 덮어 쓴 상태라 마치 가림 막을 쳐 놓아 실루엣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현주는 과감하게 서가 앞으로 진입했다.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처음 벽을 건드렸듯이 책 한 권을 지정한 다음 손가락으로 아랫부분을 쿡 찔렀다. 순식간에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져 책 한 권이 빠져버린 자리는 이빨 빠진 것처럼 시커멓게 보이면서 순간적으로 생각이 암전 되듯 멍해졌다. 현주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주저앉아 책만 응시했다. 노란 표지를 가진 책이었다. 마치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책을 되찾은 느낌이 든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지면서 책갈피를 덮고 있던 먼지가 털려지면서 표지를 드러냈던 모양이었다. 현주는 책을 집어들 생각은 않고 노란 표지를 살짝 들추기만 했다. ‘선택의 조건’. 제목이었다. 현주는 화들짝 놀라 한참 동안 제목을 바라보았다. 이내 마취되듯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그 상황은 종료됐다.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족회의가 열렸다. 성년이 된 남자들이 공회당으로 모여들었다.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부족의 성년 남성들이 모두 모이자 다소 소란스러운가 싶더니 이내 회의가 시작됐다. 회의를 주재한 이는 부족장이었다. 부족장이 말문을 열었다. 안으로는 부족의 안위와 풍속을 지키고, 밖으로는 외부의 흉악한 무리들로부터 부족을 보호하기 위해 성을 쌓아야겠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토를 다는 이는 없었다. 성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동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만큼 회의가 권위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분위기 같기도 했다. 성을 쌓는 방법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부족장이 제시한 것이 그대로 반영됐다. 기초공사를 할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모여서 하기로 했다. 그 다음부터는 부락단위로 구역을 정해서 성을 쌓아올리기로 했다. ‘돈내기’ 방식이었다. 구역별로 할당된 일만 하면 더 이상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건이었다. 그 날 회의는 모두가 박수를 치면서 마무리했다. 싫든, 좋든, 달리 방법은 없었다.

책에는 그 다음 날부터 그 날 그 날 작업한 일들이 일기장처럼 상세하게 나열돼 있었다. 어느 부락이 어느 구역에서 어느 정도를 쌓았고 하는 식의 기록들이 지루할 정도로 계속 적혀 있어 책장이 아깝다고 여겨질 지경이었다. 책의 1/6 정도 되는 곳에서 새로운 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부족장 이름만 바뀌었을 뿐 책을 구성하고 있는 서술방식은 한결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책장을 뒤로 넘길수록 6명의 부족장들이 이름을 바꿔가며 성을 쌓아 가는 지루한 서술이 이어진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여섯 번째 부족장의 치적사항이 장황하게 열거돼 있었다. 성 쌓기를 완성한 그의 공적을 만천하에 알리고 후대에 길이 이어 전하고자 하는 과욕이 차고도 넘쳐나 보였다. 그 마지막 부족장은 처음 성을 쌓기 시작한 부족장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었다. 안을 보호하고 밖을 방어할 정도로 성 쌓기를 완성하고 나서 모인 부족회의에서는 이전보다 다르게 다소 과격하다 할 정도의 난상토론을 벌인 흔적도 보였다. 과거 권위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던 부족회의 보다는 전혀 다른 반전이었다. 성을 쌓는데 모든 부락의 공로가 있었지만 특히 드러내 치하하면서 선물을 하사할 부락을 선택하는 방법의 문제였다. 대표적인 의견은 가장 먼저 일을 마친 부락에 선물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부락에서는 성축을 얼마나 튼튼하게 쌓았느냐를 판단해서 선물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토론이 아니라 혈투라는 표현이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험한 말과 부락을 옹호하는 악다구니가 난무했다. 이 자리에서 부족장은 그 어느 부락의 주장에도 손을 들어주지 않고 ‘선택의 조건’으로 수수께끼 같은 물음 하나를 던졌다.

한기를 느끼면서 현주가 깨어났을 때 방안이 희붐했다. 꿈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생생한 기억을 좇으려 애를 썼다. 부족장이 던졌던 ‘선택의 조건’이 뭘까 하는 궁금증에서 마지막 책장을 떠올려보려고 무진장 노력했으나 끝내 기억을 되돌릴 수조차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부족장의 수수께끼 같은 물음에 명확하게 답을 한 이가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현주는 떡 먹은 노인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입가에 쓴웃음을 머금었다. 배가 몹시 고팠던 노인이 길거리를 헤매다가 간신히 한 마을을 찾아 들어가서 차례로 아홉 개의 떡을 얻어먹은 다음에도 배부른 것을 못 느끼다가 마지막 한 개와 물을 얻어 마신 다음에야 배가 부르다면서 마지막 한 개의 떡과 물을 준 이에게 납작 엎드려 절을 했다는 이야기다. 먼저 먹었던 아홉 개의 떡은 까맣게 잊어버린 노인과 성을 완성하기 위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던 선조의 공로를 팽개쳐버린 부족장이 머리에서 좀체 떠나지 않았다. “용맹정진은 시종여일해야 한다”라는 가르침을 일깨워준 회당대종사의 말씀이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