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착각은 자유다?

편집부   
입력 : 2016-12-01  | 수정 : 2016-12-01
+ -

예전에는 유행어가 드문드문하여 꽤 오래 통용되곤 했다. “착각은 자유다.”도 그 중 하나이다. 그런데 교양철학 시간에 교수님이 “착각은 필연이다. 자유가 착각이다.”라고 반론하셨다. 부연설명이 없었고 그 말만 뇌리에 남았는데, 최근 인상적인 착각 사례를 경험하게 되어 다시 들추어보고자 한다.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한 내내 아래층의 소음항의에 온 식구가 늘 조심조심 움직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혼자 있던 아내가 잠이 든 지 한 시간이 지난 자정 즈음에 경비실에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래층의 소음항의였다. 소음이 생길 여지가 없는 상황임을 피력했고, 그 이후로는 소음항의가 없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을 있는 대로 보고, 그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대하는 것을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는다고 한다. 있는 그대로와 기대하는 대로의 차이가 곧 착각이니 우리의 삶은 온통 착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지개를 처음 프리즘으로 만들어낸 뉴턴은 7음계를 이상적인 소리 구성으로 여겼었고, 그에 따라 무지개 색의 연속체에서 일곱 빛깔만을 도출했다. 실제로는 무한정의 색깔 혹은 빛의 삼원색을 거론했어야 할 것이다. 객관성을 신조로 삼는 과학자들에게도 미리 마음속에 자리 잡은 사전 경험, 지식, 기대에 따라 연구대상을 관찰하게 되므로 순수한 관찰은 있을 수 없고, 그 결과 나온 이론은 늘 오류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착각은 선입견이 적절하지 않게 발현된 데서 비롯되고, 짧으며 해프닝으로 끝날 때가 많다. 물론 상황에 따라 결과가 심대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무안함과 자탄으로 끝난다. 잘못으로 밝혀져 스스로에게 수용되면 중요한 학습효과도 낳는다. 그런데 부적절한 선입견이 수정되지 않고 지속되어 반복 확인과정을 거치거나 집단화하면 고정관념으로 변하고 이는 오해로 비화된다. 오해는 많은 경우 심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착각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일상을 영위하는 것도 어찌 보면 긍정적 착각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긍정적 착각의 힘을 제거하면 우리는 곧 우울증에 노출되고 만다. 실제로 우울증 환자는 일상에서 착각의 빈도가 낮다고 한다.

착각은 소소한 데서부터 플라세보(가짜약) 효과 같이 연구되어 이름이 붙여진 것까지, 또 부정적인 데서 긍정적인 데까지, 범위를 어디까지 잡을지에 따라(‘사랑의 콩깍지’에서 ‘지역감정’ 등까지) 그 스펙트럼이 방대하여 우리의 삶과 일상적 행동 전반을 아우를 수 있을 정도이다.

우리의 삶이 온통 착각에 기반하고 있을 수 있음을 심각하게 고민한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그가 착각의 소지가 있는 것을 모두 걷어내고 나서 단 하나 남긴 것이 의심하고 있는 자신임을 파악했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착각은 필연, 곧 인간은 착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판단준거가 될 진실을 찾아 방황해야 할 것이고, 이런 존재가 영위하는 삶을 곧 ‘고해’라 하지 않았을까? 사족으로, 이런 식의 논리를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라고 하고 이 또한 착각에 속한다. “벽에다 총알을 쏜 뒤(착각은 필연이고 참을 찾아 방황), 그 총알자국을 중심으로 과녁(고해의 의미)을 그리는 방식의 오류”이다. 

신재영/위덕대 교육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