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40

편집부   
입력 : 2016-11-15  | 수정 : 201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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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혜력은 신통함

"다라니의 염혜력(念慧力)은 듣는 바를 잊지 않고 염혜력은 익힘 없는 무량(無量) 경전(經典) 뜻을 알며 염혜력은 일찍 듣지 못한 바를 들어 알며 염혜력은 보지 못한 때와 곳의 일을 알며 염혜력은 소리 듣고 본(本)과 말(末)을 분별하여 그 실상(實相)을 관(觀)하므로 그의 생멸(生滅) 알게 되며 염혜력은 총지(總持)하여 흩고 잊지 않는 고로 모든 법에 거의 없되 묻는 바를 답해 주고 뭇 가운데 있더라도 두려운 바 하나 없이 사자 같고 우레 같이 변재낙설(辯才樂說) 연설(演說)한다."('실행론' 제3편 제3장 제8절 가)

믿음으로 성취하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개울인지,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방향감각조차 잃었다. 겁이 많아 자전거도 못타던 기억을 잊고 친구 손에 이끌려 바이킹에 올라탔다가 언제 끝날 줄도 모른 채 멀미와 요의를 동반한 인내의 시간을 기다리는 듯한 초조함만 엄습했다. 마감시간은 불과 두 시간 여 정도 밖에 남겨져 있지 않았다. 이럴 어쩐다, 이런 고통을 알면서도 왜 원고를 써보겠다고 덜컹 약속을 했는지 후회막급이었다. 편집자에게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으니 빨리 다른 사람을 섭외하라는 말을 던져놓고 전화기도 꺼 놓은 채 사라지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하지만 이틀도 아니고 두 시간, 이 시점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슴은 답답하고 타들어 가는 속은 무엇으로도 달랠 수가 없었다.

째깍째깍…….
‘내가 이러려고 원고를 쓰겠다 약속했던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평소에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던 시계 초침소리가 우레처럼 또렷하게 들리면서 초조함을 더하게 했다. 태영이는 앉아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옷을 훌러덩 벗어제치면서 세면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물을 가장 센 쪽으로 돌려놓고 머리부터 씻어내려 갔다.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맴돌기만 하고 실마리가 풀리지 않던 첫 문장이 어설픈 손짓을 하듯이 희붐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듯도 했다. 그 순간 샤워기 물을 맞으며 조금만 더 있으면 완벽한 첫 문장이 떠오를 것도 같았다. 일말의 희망을 품으며 잠시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마냥 허송세월을 하고 있을 정도로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태영이는 하는 수 없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물기를 훔쳐내지도 못하고 수건을 몸에 두른 채 서둘러서 세면장을 나섰다. 막상 책상 앞으로 가 자리에 앉았지만 좀체 진도를 낼 수 없었다. 뭔가 쓰여질 것 같았는데 컴퓨터 자판 위의 손가락은 통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대략난감이라는 말은 이럴 때 필요한 적절한 말일 거라는 쓸데없는 생각만 자꾸 머릿속을 헤집으면서 여기저기로 떠다녔다. 시간은 그동안 15분이나 허비해버리고 있었다.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태영이는 세면장 앞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거울을 들여다보며 스킨과 로션을 바른 뒤 머리도 빗어 넘겼다. 그리고는 물 컵에 커피를 타서 들고 책상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첫 문장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릿속을 뱅뱅 돌기만 할 뿐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은 창에 한 글자도 써지지 않았다. 글을 쓰기 전에는 늘 주변정리를 가지런히 하는 버릇이 있었던 태영이는 주섬주섬 책상 주변에 놓여 있던 책이며 각종 노트들을 반듯하게 다시 정리해놓고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콩닥거리는 마음만큼 자판 위의 손가락이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무기력해지는 느낌에 가위눌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온 몸이 짓눌리는 듯한 무게를 견디다 못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못쓰면 그만이지, 하는 되지도 않을 생각을 하면서 벌떡 몸을 일으켜 책상 주변을 왔다 갔다 배회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이었다. 성실한 공무원으로 생활하는 대학친구였던 진이가 했던 말이 번개처럼 스쳤다. 그의 손에 이끌려 심인당에 다니면서, 글 쓰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는 태영이에게 언젠가는 요긴하게 필요할 때가 있을 거라며 들려주었던 말이다.

“만약 유위 세력으로 널리 증익 못하거든 무위법에 주하여서 보리심만 관할지라. 불이 이에 만행 갖춰 정백하고 순정한 법 만족한다 설하니라.”
태영이가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를 헤아리지를 못했다. 그래서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진이는 ‘부처님의 가지력과 관행자의 공덕력과 저 법계의 통합력에 의해 이룰 수 있다’는 말이라고 덧붙여 주었다. 그래도 태영이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어 했다. 진이가 ‘글 쓰는 사람이 그 정도도 몰라서야 되겠느냐’라고 하면서 한 마디를 더 해주었다. ‘글을 쓰든, 아니면 다른 무슨 일을 하든 새로운 일을 도모하던 중 도대체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때는 너무 깊이 고민만 하지말고 가만히 앉아서 염송을 해보라’고 권했던 것이다.

진이의 말을 믿고 태영이는 소파에 앉아 염송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염송은 진이의 권유로 한 달여 전부터 매일 아침마다 정송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던 참이라 방법을 모르거나 어색할 것은 없었다.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반가부좌를 한 채 허리를 곧추 세운 다음 금강지권으로 결인을 해서 염송을 하기 시작했다. 초조한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시간을 봐가면서 염송을 하는데 그동안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안개 속을 떠다니던 것처럼 희미하게만 어른거리던 첫 문장이 이내 또렷하게 조합되고 있었다. 태영이는 첫 문장을 조합한데 이어 칼럼 한 편 전체를 머릿속으로 구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염송하는 시간을 좀 더 갖기로 했다. 마치 자연풍광을 보고 풍경화를 그리듯이 칼럼 한 편이 그림처럼 엮이기 시작했다. 수를 놓듯 기승전결을 나누어가면서 잘 짜여진 글은 베틀에서 직조된 카펫 마냥 가지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태영이는 서둘러서 염송을 끝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마감시간은 한 시간여가 남아 있었다.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도감이 들었다. 태영이는 컴퓨터 바로 위를 비추는 스탠드까지 켜고 본격적으로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좀체 글자를 찍어내지 않고 있었던 자판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글자를 만들어 나갔다. 채 30분이 안 돼 초벌칼럼은 얼추 완성됐다. 태영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면서 입으로는 나직이 염송을 했다.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태영이는 얼떨떨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다. 개인의 힘이나 환경의 작용만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일까지 능히 해낼 수 있는 이 힘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봤다. 곱게 물든 단풍잎이 늦가을 햇살을 받아 붉거나 노란빛을 저마다 내뿜고 있었다. 어찌 저리도 고울 수 있을까? 마음이 여유를 찾으니 사물이 보이고 속성까지 알아차릴 수 있는 까닭을 알 것도 같았다. 태영이는 평소 좋아했던 ‘항상 그른 마음 없이 일체 처에 자심이 부끄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 계행이라’는 글귀를 떠올렸다.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을 때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으며, 여유도 거기서 누릴 수 있다는 이치도 알 것 같았다. 옳은 일은 원하고 매달리면 언젠가는 되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면 안 되는 것, 그대로가 진리라는 말도 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개인의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전체를 위한 옳고 바른 일이라면 부처님의 가지력과 관행자의 공덕력과 법계의 통합력으로 이룰 수 있다는 원리가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됐다. 우주자연의 순환법칙은 법계의 질서에 따르고 이치에 맞춰 또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