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 알기쉬운 교리문답

편집부   
입력 : 2016-08-18  | 수정 : 201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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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참고 살아야 하나요?

단거리를 순식간에 달려야 하는 건 우사인 볼트만의 업장은 아닌 모양이에요. 우리는 평소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거든요. 온갖 먹거리들이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바빠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다는 거잖아요. 예전보다 수입도 많아지고 더 잘 먹고 편리하게 살게 되었지만 가장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자가용을 가진 이들도 많아졌고 지하철도 늘어났지만 사람들의 걸음은 더 빨라지고 성질은 급해졌어요. 사람이 길가에 있는 것을 알면서 바쁘게 차를 모는 바람에 물이 튀어서 옷을 버리고 얼굴에까지 묻게 하는 경우도 다반사입니다. 그 뿐인가요? 중학생, 심지어는 초등학생들까지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지만 정작 가족 간의 대화는 단절되어 활기를 잃었어요. 인류는 외계의 달나라도 정복했지만 옆에 사는 이웃 만나기는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하늘 한 번 제대로 올려다 볼 마음의 여유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각박한 세상에서 고달픈 영혼을 위한 휴식처는 ‘서로를 이해하는 관계의 품’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관계의 완성으로서의 ‘가족’과 ‘직장’을 꿈꾸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금 어떻습니까? 사회적 강자가 상대적 약자에게 부리는 ‘갑질’로 인해 소위 ‘감정노동’ 종사자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고 있어요. 심지어 아파트 주거민들의 노골적인 무시나 열악한 처우로 인해, 강남의 고급 아파트 경비원이 분신해 사망한 일도 있었지요. 당시 동료 경비원들은 이씨가 분신한 이유로 한 사모님을 지목하며 “평소에 폭언을 하면서 5층에서 떡을 던지거나 먹던 과자를 먹으라고 하는 등 경비원들에게 모멸감을 줬다”고 전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외로운 그늘 속에서 쓸쓸히 ‘감정노동’에 종사하며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많은 감정노동자들이 소화기관의 고통을 자주 호소하는데 그 이유는 ‘속상해 죽겠다’, ‘속이 뒤집힌다’, ‘비위(비장과 위장)가 상한다’, ‘밥맛 떨어진다’, ‘구역질 난다’ 등과 같은 부정적 감정 상태를 자주 접하기 때문이랍니다. 감정노동이 힘겨운 이유는 종종 찾아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진상 고객들’이 차마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꼴불견 행태를 보이기 때문인데요, 한 마디로 배려를 모르는 거지요. 이들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고 분노가 치밀지만 그것을 내색하지 못하고 수용해야만 하는 처지를 견디기 어려운 거예요. 고객의 눈에 보이는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애써 만들어내다 보니 그야말로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처참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속을 끓이며 참는 하근기 인욕(忍辱) 수준은 힘겹게 유지하더라도, 모든 상황을 편안하게 수용하는 안인행(安忍行)이 쉽지 않더라는 거예요.

무턱대고 참는 것과 참아야 하는 이유를 알고 참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겠지요. 이유를 잘 알고 참아야 편안한 ‘참음’이 됩니다. 왜 참아야 하고, 또 어떻게 참아야 할지,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봅니다. 

“참된 인욕행은 인생 행복의 근본이 된다. 참고 견디는 길이 자기 영혼을 보존하는 길이다. 농사짓는 농부가 여름에 밭에 나가지 아니하고 집에서 낮잠을 자면 가을에 좋은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마음농사 짓는 것도 게으르면 안 된다. 어려운 고행을 왜 해야 하는가? 나쁜 것을 몰아내고 좋은 법을 실천하기 위함이다. 욕하는 사람은 욕을 하지 말고 참아야 하며, 투도하는 사람은 투도하지 말고 참아야 하며, 남을 경만하는 자는 경만함을 참아야 한다. 우치하고 미련하고 게으르고 삿된 것을 모두 몰아내면 곡식 곁에 난 풀을 뽑아 그 곡식이 잘되게 하듯이 선(善)이 그 자리에 자라나게 된다.” (실행론 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