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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빛이 자라고 있다.

편집부   
입력 : 2016-06-01  | 수정 : 20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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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 몸속에서 매일 빛이 3~4 센티미터씩 자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교주로 대일여래 즉 비로자나불을 내 마음 속에 모시고 온 누리에 빛으로 나투신 ‘내가 바로 부처임’을 인식하고자 아침저녁으로 “비로자나 부처님은 시방삼세 하나이라. 온 우주에 충만하여 없는 곳이 없음으로 가까이 곧 내 마음에 있는 것을 먼저 알라.”는 종조님의 자성법신의 말씀으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잡아함경』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나온다. 첫째 밝음에서 밝음으로 향해 가는 사람, 둘째 어둠에서 밝음으로 향해 가는 사람, 셋째 밝음에서 어둠으로 향해 가는 사람, 넷째 어둠에서 어둠으로 향해 가는 사람 등이다. 우리가 처음 이 세상을 만났을 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사회적 환경과 세상에 맞서 성공 신화를 일궈낸 사람들을 주변 곳곳에서 종종 만나게 된다. 그들은 어찌 보면 어둠에서 밝음을 몸소 실천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어둠인 사회적 환경과 조건을 탓하기 이전에 그런 상황이나 조건들과 정면으로 맞서 부딪치며 일궈낸 소중한 경험들을 바탕으로 옹골찬 삶을 이끈 이 시대의 보이지 않는 인간승리의 부처들 일 것이다.

벌써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일이지만 새해 49일 회향일을 며칠 앞 둔 어느날 이었다. 느닷없이 한 보살님께서 “전수님! 대문 앞 종단 홍보 게시판이 찢겨 있던데 혹시 보셨나요?” 그 말을 듣는 찰나의 한 순간이 그날따라 왜 그렇게도 길게 느껴지던지 그와 동시에 무엇에 홀린 듯 걷잡을 수없는 진심의 불꽃을 진정 시키는 데는 한참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 다음날 바로 가서 확인을 해보니 칼로 도래 낸듯한 흔적이 또렷했다. 첫날 확인 했을 땐 분명 한 개의 게시판만 그랬었는데 그 다음날 게시판이 보기가 흉물스러워 교체 수리하려고 가보니 두 개의 게시판에도 똑같은 모양과 방법으로 또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어 게시판이 너덜너덜 찢겨져 있었다. 그날 밤 별의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잠자리 내내 불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한 채 잠을 청해야만 했다. 혹 이교도 특히 기독교인들의 무례한 소행이 아닐까하는 추측성 의심, 확실한 근거나 물증도 없으면서 그들을 의심하며 죄 아닌 죄를 짓는 내 자신 스스로가 괴롭기 그지없었다. 그런 행동을 일삼는 그들의 심리적 이유나 상태가 몹시 궁금했다. 아무런 생각도 이유도 없는 중·고생들의 재미로 행해진 멘탈 행위인가도 의심해 보고, 아님 심인당 마당에 주차 금지 팻말에 대한 사회 부적응자의 보복성 행위일까도 의심해 보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회심리학에서 강조한 우리의 정신적·신체적 건강이 사회적 결속(관계)의 크기와 질에 달려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위안보다는 씁쓸함과 말 못할 허기가 아프게 몰려왔다.              

갑자기 프랑스 파리 지하철공사가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 오르텅스 블루의 『사막』이란 짧은 시 한 편이 떠올랐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이 짧은 한 편의 시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소통의 단절과 사유와 자기성찰의 부재’라는 우리 각자의 마음의 문제인 “어디를 향해 끊임없이 가고 있는가?”라는 우리의 내면속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 구원의 물음으로 간결하고도 압축적으로 잘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더 외롭고 더 쓸쓸했다.
 자동차를 칼로 흠집 내고, 멀쩡한 건물에 방화를 일삼고 분을 삭이지 못해 저질은 지하철과 숭례문 등의 일렬의 방화사건 등은 어찌 보면 우리 사회가 잉태한 외롭고 쓸쓸한 가끔은 한번쯤은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삶의 한 형태로써 일탈의 모습과 소통의 부재가 낳은 외로움의 자아 정체성을 확인해 보려는 고민과 아픔의 또 다른 표현들이라 하기에 앞서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정신적, 심리적으로 작용한 불안의 요소가 무엇이었는가를 먼저 되짚어 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일들 때문에 아파하고 상처받으면서, 때론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위로와 격려를 받으면서 가끔은 잊혀지기도 하고 때론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하며, 그렇게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고통과 상처를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중생의 업력에 이끌리는 삶의 길을 살아갈 때도  참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 게시판 사건이 있은 후 내게 많은 변화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라도 한번쯤은 입장 바꿔 생각해 보고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는 노력과 혜민 스님의 말씀처럼 ‘멈추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사색의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사소한 것들조차도 경이롭고 감사하던지 피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상대자의 저 허물이 내 허물의 그림자일 터 혹 내게도 무의식적으로든지 아니면 마음으로라도 누군가에게 마음을 아프게 도래 내는 인연은 짓지는 않았는지, 그리하여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는 입히지 않았는지, 이 일을 계기로 자꾸 스스로에게 되묻는 버릇이 생겨났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와 인연돼서 생기는 일임을 왜 모르겠는가. 늘 일상생활 가운데 깨달음이 있음을 굳게 믿고 마음공부를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 경계를 훌쩍 뛰어 넘어 해탈의 대자유를 얻어야만 마땅하겠지만 늘 허상에 매달리는 집착의 시간을 보내며 내가 이 사건을 계기로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을 내 허물로 바라보면 하심이요, 남의 허물로 바라보면 모든 것이 진심”이라는 우리들 마음속에 날마다 빛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정심인당 교화스승 수진주 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