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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와 반응

편집부   
입력 : 2016-05-17  | 수정 : 2016-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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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시험 쳐서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도시락으로 저녁까지 해결하면서 교실에 남아 같이 공부를 하였다. 잠시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담임선생님은 아침에 다들 어떻게 일어나는지 물으셨다. 몇몇이 “지금 괴물과 싸우고 있다.” “(라이벌) 누구를 생각한다.”(웃음)는 등 나름의 방법을 소개하였다. 가만있는 게 낫겠다 싶어 침묵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를 지목했다. 얼떨결에 당시 내가 하던 대로 “그냥 하나, 둘, 셋 하면서 일어나는데요.”라고 답했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내심 우려하였지만, 그까지는 아니고 생뚱맞지만 일리가 있다는 정도의 선에서 무마되었다. 그 일화에 담긴 의미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어느 학자의 ‘무용담’을 통해 이해되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닐스 보어는 늘 활기에 찼고 온갖 스포츠 애호가였다. 틈틈이 서부영화를 즐겼는데 남들은 ‘영화니까…’라며 넘어가는 장면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왜 주인공은 악당보다 늦게 총을 뽑으면서도 늘 이기는가? 그가 떠올린 가설은 ‘반응이 의도보다 빠르다.’ 였다. 즉 어떤 자극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동작이 궁리를 한 후 의식적으로 실행하는 동작보다 빠를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동료들과 검증에 들어갔고, 도구는 기발하게도 물총이었다. 주인공 역을 맡은 보어는 연전연승이었고 그의 가설이 맞는 것으로 당시 일단락되었다.   

80여 년이 지난 2010년, 보어의 가설을 버턴 누르기 실험으로 검증한 연구가 언론에 소개되었다. 결론은 단순반응하는 동작이 의도된 동작보다 빠르기는 하지만 차이가 너무 적어 총싸움을 할 경우 둘 다 죽게 되며, 당시 보어는 운동신경이 워낙 뛰어나 매번 이겼다는 해석이었다. 하지만 실험실이 아니라 실제 경쟁이나 생사가 걸린 상황이라면 반응과 의도 간의 빠르기 차이는 더 커지게 되지 않을까. 나아가 동작의 질에도 차이가 나타날 것이다. 권투선수들도 무의식적 반응의 원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고 한다.     

운동선수들에게서 나타나는 입스 증후군은 승부의 부담감과 실패의 두려움이 근육을 경직시키는 증상이다. 양궁선수가 다른 타깃에는 잘 쏘지만 유독 과녁은 맞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보어의 가설을 적용하면 이는 지나친 의도성 때문이고 처방은 상호배타적으로 작용하는 반응성 높이기가 될 것이다. 상황을 좁게 설정한 후 최대한 반응하기에만 집중하면 의도성(멘탈) 제어에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자신의 일이 되면 동일한 과제라도 잘해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지지부진할 경우가 있는데 남을 돕는(반응하는) 경우가 되면 더 나은 수행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파킨슨 증후군의 경우 의도하는 동작은 실행하기가 어려운 반면 반응하는 동작은 그 정도가 덜하다고 한다. 의도성을 낮추면 보다 수월하게 동작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달인들은 동작을 자동화시키려고 노력하고 그만큼 실수도 적어진다. 그 바탕에는 반응이 의도보다 효과적이라는 원리가 놓여 있다. 피곤한 수험생들도 하나, 둘, 셋 하는 구호에 반응하는 것이 이것저것 따져서 기상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 교실에서는 어떻게 따질 것인가가 주제였고 반응이라는 방식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의도와 반응의 원리는 유위와 무위의 가르침을 동작의 역학 분야에 옮겨 놓은 것인 듯하다.  

신재영/위덕대 교육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