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33

편집부   
입력 : 2016-02-16  | 수정 : 201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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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체법문

"시방삼세 나타나는 일체 모든 사실들과 내가 체험하고 있는 좋고 나쁜 모든 일은 법신불의 당체(當體)로써 활동하는 설법이라. 밀(密)은 색(色)을 이(理)로 하여 일체 세간 현상대로 불(佛)의 법(法)과 일치하게 체득함이 교리이니 체험이 곧 법문이요, 사실이 곧 경전이라."('실행론' 제2편 제9장 제1절 가)

마음으로 보라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좋게 보는 것처럼…….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그렇고,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그렇다. 그래서 눈으로만 본 것을 가지고 속속들이 다 보았다고 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단지 지금의 현상이 눈이라는 기관을 통해 마음 속으로 들어온 순간의 알음알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상태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혜령은 알고 있었다.

고척산 입구에 들어서니 소나무 향이 코를 자극했다. 코를 통해 들어온 짙은 소나무 향은 머릿속을 청소라도 해준 것처럼 뽀송뽀송한 기운마저 들게 했다. 혜령은 한 주간동안 밀려든 일을 처리하느라 피곤했던 몸이 덩달아 한 순간에 쫙 펴진 듯한 기운을 돌며 거뜬히 날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고작 2~3시간씩 자면서 몸을 혹사시킨 탓이었다. 오전 내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뒹굴다가 간신히 몸을 추슬러 집을 빠져나온 것이 잘한 일이라 여겨지면서, 몸이 가벼우니 눈에 들어오는 것마다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고척산 입구 소나무 숲은 원래 일품이었지만 오늘처럼 멋있어 보이고, 고맙게 여겨진 적도 드물었다. 지친 몸과 흐트러진 마음을 한꺼번에 달래주는 성소처럼 보인 것도 처음으로 든 마음이다. 소나무 향으로 인해 기운을 차린 혜령은 등산로가 시작되는 입구의 너른 터 소나무 숲에서 한참을 쉰 다음 내처 한달음에 고척산 정상까지 거뜬하게 오를 수 있었다. 혜령은 고척산 정상에서 D도시를 내려보다가 두 해 전 혼자 감행했던 해외여행을 떠올렸다.

넉넉하게 주어진 열흘 간의 휴가를 어떻게 보낼까, 하고 고민에 빠졌던 혜령은 홀로 해외여행을 계획하면서 차근차근 준비에 들어갔다. 혼자서 떠날 해외여행은 준비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비행기편은 물론 숙박지를 선택해서 예약하고 여행코스를 짜야하는 등 만만찮은 과정의 연속이었다. 간단하게 갈아입을 옷과 필수품 정도의 짐만 챙겨서 가볍게 떠났던 단체여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할 일이 많아 중도에 여러 번 포기를 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도전정신으로 감행했던 탓에 결국 생애 처음으로 홀로 해외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지금까지 자라면서 해온 일 중에서도 가장 잘한 일로 기억할 정도다.

마치 눈감고 길을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출발하는 날 공항에서부터 애로사항은 산적해 있었다. 준비과정에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시시때때로 터져 나왔다. 그야말로 사건의 연속이었다. 과연 제대로 갔다 올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그 자리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이 일어났다. 혜령이 그때마다 생각을 다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와 했던 내기게임 때문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말에 쌍수를 들고 반대를 했던 어머니는 도중에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내기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혜령은 의기양양해 하며 어떤 경우라도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다짐을 했던 터라 아무리 험난한 고난과 역경이 닥칠지라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해외여행 첫째 날 진을 다 빼고 나니 다음 날은 움직일 수조차 없을 것 같아 숙소에서 널브러져 버렸다.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에 기진맥진했던 몸은 동력을 잃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로봇처럼 축 쳐졌다. 둘째 날 하루를 꼬박 그렇게 보내고 보니 뭔지 모르게 손해를 본 듯도 하고,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셋째 날에는 간신히 몸을 추슬러 밖으로 나섰다. 여행지가 도시에서는 한참을 벗어난 한적한 곳이었던 탓에 머리는 비교적 가벼워진 듯 했지만 몸은 쉬 기운을 회복하지 못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적응을 한 모양이었다.

그 다음 날은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삼일을 공친 기분이라 더 열심히 좇아 다니며 더 많이 보겠다는 생각에서 서둘렀던 것이다. 입을 앙 다물며 의기양양하게 길을 나섰지만 막상 갈 곳이 마땅찮았다. 계획했던 곳은 짐작했던 것보다 너무 멀다고 했다. 쉽게 포기를 하고, 하는 수 없어 다른 곳을 둘러볼 양으로 지도를 펼쳐가며 손짓, 발짓 다해서 묻고 또 물어보았으나 대략난감이었다. 혜령은 하는 수 없어 숙소 주변을 걸어보기로 했다. 걸으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운동도 하고 복잡한 머릿속이나 정리하자는 생각이었다. 혜령은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더 먼 곳으로도 충분히 가볼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점점 차 오르는 것을 느꼈다. 몸도 서서히 적응해 가는 듯 여겨져 안도감마저 들었다.

닷새 째 되는 날 혜령은 달랑 지도 한 장을 의지한 채 무작정 길을 재촉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그곳을 찾아가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던 것이다. 무사히 찾아가면 다행이겠지만 설령 그곳을 못 찾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아야지 하는 마음이 앞섰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다싶어서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물어 물어서 버스를 타고, 거금을 들여 택시까지 타고서 도착한 그곳은 여행서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다소 황량하기까지 했다. 연구를 업으로 하거나 나름대로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나 겨우 찾을 수 있을 고대유적지여서 일반인들이 잘 모를 수밖에 없었구나 싶었다. 숙소 인근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이 그렇게 중요한 유적지인 것조차 모르는 것이 입증된 셈이라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바라 혜령은 먼발치로 바라다 보이는 석상을 주시하며 하얀 미소를 날렸다.

석상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단순하게 보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수백 번을 계획하고 준비해서 찾아올 것이다. 뭐든지 그렇다. 모든 것은 저 나름대로 귀하다. 하찮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눈으로 보이는 만물도 그렇고, 귀로 들리는 뭇 소리도 마찬가지다. 코로 맡아지는 냄새도 저마다는 고고한 향을 가졌고, 혀로 가늠할 수 있는 갖가지 맛도 독특한 미감을 지닌다. 몸의 감각으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다 그렇다.

혜령은 눈앞에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했다. 자기 앞에 나타나는 모든 것은 자기의 마음상태가 드러남이요, 사실에 끌림은 자기의 의지가 작용함인 것을 알았던 것이다. 눈과 귀, 코, 혀, 몸의 감각기관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맞보고, 느끼는 것은 자기의 심경이라는 것을 석상 앞에서 다시 깨달았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 파김치가 되어 며칠을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며 출근도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중요한 여정이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혜령은 고척산 정상에서 숨을 쉬고 느끼면서 한 주간의 피로를 말끔하게 씻어버렸다. 지금의 이 찰나 역시 다시는 가질 수 없다는 마음이 드는 순간, 그 순간이 새삼스럽고, 째깍 째깍 흘러가는 시각이 아까워 산에서 내려가려던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가깝게, 때로는 먼발치로 보고 느끼는 이 풍광 또한 이 시간을 벗어나서 다시 보고, 느낄 수는 없는 것이기에 다음을 기약할 일이 아니었다. 등산로 입구의 너른 터에서 등산을 시작하며 맡아보았던 싱그러운 소나무 향도 산을 내려가면서 느낄 때는 분명히 다를 것이었기에 어느 때나 그 찰나가 새롭고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이 헤아려졌다.

마음이 열리니 보이는 것이 다르고, 보이는 것을 좇아서 생각이 변하니 행동까지 달라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듯 싶었다. 인연의 싹이 나고 자라서 결과로 드러나 눈앞에 보여지는 이치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이 순간 눈앞에 드러나 보이는 것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