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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 일으키는 대로 다 되는 것이 복이 아니다

편집부   
입력 : 2016-01-29  | 수정 :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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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굶으면 죽고, 먹으면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먹고도 죽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어른 중에는 술을 너무 먹다가,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먹습니다. 그런가 하면 제법 성공한 사람 중에는 먹어서는 안 될 부정한 돈을 받아먹다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탐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만져지고 느껴지는 유형(有形)의 대상에 대한 탐심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으로써 드러나는 탐심이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형태의 탐심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일으키는 것이 바로 시간에 대한 탐심입니다. 어떤 결과를 수확하기 위한 인고의 기다림은 기나긴 수행과 경험 끝에 얻어낸 지혜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에 대한 탐심으로 초래된 조급증 때문에 일을 그릇 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백일 불공의 공력을 쏟아 부어도 이루어질까 말까 할 대원(大願)을 일으키고서, 고작 한자성 불공만으로 그 원이 성취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우리가 늘상 저지르고 있는 조급증, 시간적 탐심의 극치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버리지 못하는 두 가지 애착이 있는데 하나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에 대한 애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경계를 과감히 뛰어넘어 나 이외의 타인을 위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큰 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삶에는 ‘일시적인 안락’이 있고, 물질을 베푸는 삶에는 ‘영원한 안락’이 인연 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적어서 가난한 게 아니라, 베풂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고, 진정한 부자는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나눔이 많은 사람입니다. 부자에게도 등급이 있습니다. 그냥 보통 부자는 아는 사람에게만 베풀 수 있는 사람이지만, 진정한 부자는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베풀 수 있습니다.

마음 쓰는 공부는 단시의 실지를 성취하기 위한 공부입니다. 우리가 희사행의 공덕을 추구하는 데 가장 장애되는 것은 바로 탐심에 전도되는 것입니다. 재물은 써야 할 곳에 잘 쓰였을 때, 또 다른 재물이 또다시 인연되어 옵니다.

내가 재물을 쓸 때 부처님께 먼저 희사하고 쓰게 되면 부처님께 희사한 재물에 의해 나머지 재물이 모두 정화됩니다. 이러한 정화된 재물은 사람을 다치지 않고 적재적소에 쓰이게 되어 다시 좋은 수입을 유발케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주법계에 복이 가득하지만 어리석은 중생은 이 복을 현실이라는 한정된 보따리에 담으려고만 합니다. 이 보따리는 크기는 작고 무게는 엄청 무거운 부담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을 법계에 보관하면 장원하게 활용할 수 있으니, 들어오면 반드시 내보내야 한다는 이것이 희사의 묘리입니다. 진각성존 회당대종사는 재물이 사람에 붙는 것이지, 사람이 재물에 붙어서는 안 된다고 법문하십니다. 탐심의 본질은 분외탐심(分外貪心) 즉 자기 분수를 뛰어넘는 욕심입니다. 자기를 규정하는 다양한 그릇의 크기보다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자기가 뿌린 인연의 종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함입니다. 따라서 탐심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안분지족(安分知足) 즉 자기 분수를 지키고 자기 그릇을 키워나가는 수행이 동반돼야 합니다.

모든 물질은 잠재된 에너지입니다. 그러하기에 실제적인 에너지로의 변환을 도모해야 합니다. 물질을 태우면 열에너지가 발생하니 그 에너지로 음식을 익힐 수도 있고, 추위도 쫓을 수 있습니다. 이론적이지만, 모든 물질을 핵분열시킨다면 엄청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답니다. 지금은 과학의 한계로 특정 물질만 핵분열이 가능하지만, 진리의 수준에서 본다면 에너지화시키지 못할 물질은 없습니다. 우리 속에도 바로 이런 많은 것을 변화시킬 잠재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신행의 역량은 보유하고 있는 자원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승화시켜 유효한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능력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미래를 위한 대비’라는 명목으로 물질을 탐욕스럽게 모으려고만 합니다.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에너지화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하루에 자기 육신의 본능을 위하여 쓰는 시간과 물질이 많을수록 그는 세간적인 사람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인격과 품성을 위해 시간과 물질을 쏟고 그것을 반복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건강한 진언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장엄한 염송 소리와 서원가가 울려 퍼지는 심인당 안에서가 아니라, 삼독심이 치성하는 삶의 현장에서도, 그리고 자기중심적이 될 수밖에 없는 순간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는 참된 진언행자 말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진리를 좇아 실천하는, 그래서 진각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루가 아니라 매일 그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신행이란 위선과 교만을 극복한 결과이며, 실천의 반복을 통한 결실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지금 우리는 하루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어느 정도의 힘을 쏟고 있습니까?

수각 정사/밀각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