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31

편집부   
입력 : 2015-11-16  | 수정 : 201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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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을 세움

"작은 것을 통하여 큰 것을 보아야 한다. 가지가 많이 벌어지나 그 근본이 하나인 것을 알아야 하며 가지가 벌어질수록 그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은 근본에서 비롯됨을 알아야 한다. 본심은 불변하지만 물질은 변한다. 마음의 주체성은 천지일체(天地一切)의 근본이나 허망심(虛妄心)은 천지일체의 지엽(枝葉)이다. 그러므로 근본을 활용하여야 한다. 육근(六根)은 식()을 뿌리로 삼고 있는 것이니 안으로 하나 고치는데 밖의 큰 것이 고쳐진다. 지원(支院)에서 잘못되는 것은 그 범위가 좁고 본원(本院)에서 잘못된 것은 그 범위가 넓다. 육근(六根)에 따르면 분열하고 본심에 따르면 육근이 수정(修正)된다."('실행론' 2편 제8장 제3절 나)

누구를 위해 사는가?

흐릿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책 속의 글자들이 질서를 깨트리고 오와 열을 이탈하면서 지렁이처럼 꿈틀꿈틀 살아 움직였다. 책에 코를 박고 너무 오래 있었나 싶어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주 보이는 아파트가 피사의 사탑이라도 된 양 15도는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어라, 하는 생각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는 순간 몸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넘어질 듯 무게중심마저 이동했다. 간신히 책상 모서리를 잡고 몸을 일으켰으나 삐딱선을 탄 산돌림 마냥 생각조차 엉클어지면서 불안감이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랬다. 시력이 나빠졌나 하고 눈을 의심했다. 눈을 감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떠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걱정이 스멀스멀 온 몸을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오십견인 듯 한달 여 동안 팔을 움직이기조차 힘들어하면서도, 다리 통증으로 발을 질질 끌고 다니기를 한동안 하면서도, 가기 싫어했던 병원을 두 말 않고 찾았다. 볼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순영은 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 의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심리적인 스트레스나 외부의 어떤 충격요인이 있었냐는 의사의 질문에는 대답이 쉬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았고, 없었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약 처방을 받겠느냐는 의사의 말에 생각을 좀 더 해본 뒤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원을 나섰다. 찬바람이 쌩쌩 불면서 빈 들판에 혼자 서있기라도 하듯 허황한 마음이 들었다. 눈보라를 막아주던 비닐하우스가 걷혀지고 맨몸으로 눈서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다리가 풀리면서 길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몸을 간신히 추슬러, 돌로 나무모양을 내서 만들어 놓은 벤치에 걸터앉았다. 엉덩이부터 온 몸으로 엄습한 냉기는 심장을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하늘이 노랬다.

노란 하늘에 번개가 치는 듯 하더니 눈앞에 별이 쏟아졌다. 눈 속에 총총하게 박힌 별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은하성단을 하나 이루고도 남을 정도로 무수히 떠오른 별이 눈을 찔렀다. 얼마나 많은 별들이 솟구치고 사라져 갔던가. 순영은 눈을 감았다.

크기도 크고 밝기도 밝으면서 가장 먼저 순영의 눈을 찔렀던 별은 남편이 쏘아 올린 별이었다.

당신은 왜 스스로를 가꾸지 않아?”

개뿔……. 가꿀 총알을 줘야 가꾸든 말든 하지. 지원사격은 하나도 안 해주면서 뭐가 어쩌고 어째…….”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서부터 남편은 걸핏하면 핀잔을 주었다. 남편이 무슨 말을 하거나 말거나 순영은 코방귀만 뀌면서 대수롭잖게 받아 넘겼다. 얼굴에 찍어 바를 로션 하나를 살까, 말까, 망설이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늦둥이로 낳아 놓은 막내아들 학원비 준비가 먼저였고, 큰애 용돈이며 집안에 필요한 것 하나 더 사는 일이 먼저였다. 그런데 뭐가 어쩌고 어째……. 지가 살림을 해보지, 하면서 화가 치밀어 오를 대로 올라도 순영은 막둥이를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그만한 일로 가정을 접을 일도 아니라는 것쯤은 자신이 알고, 남편도 당연히 아는 일이려니 하면서 넘겨버렸던 것이다. 칼로 물 베기였다.

머리가 굵었다고 말대꾸를 하거나 웬만한 다그침마저도 잔소리로 받아들이면서 대드는 큰아들 놈 역시 눈앞에 별은 보게 해준, 남편과 한통속인 족속이었다. 그 에비에 그 자식 아니랄까봐 두 화상은 빈정대는 말투까지 닮아 있었다. 몸서리가 쳐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을 때는 약도 없었다. 원폭이라도 맞은 땅처럼 마음 한 구석을 푹 꺼지게 만들면서 상처만 남겼다. 그 또한 지나고 나면 괜찮으리, 하면서 자위하고 자조했다. 금새라도 헤헤거리면서 다가와 아양을 떨어댈 때는 꺼진 마음이 불룩 솟아오르면서 서운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물에 물타기였다.

남편과 자식은 그렇다 치고, 쓰고 있는 논문에 진척이 없는 사이에도 별은 무수히 만들어졌다가 사그라지기를 계속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스스로 만들고 키워서 쏘아 올린 별이라 누구에게 하소연하거나 욕을 할 수조차 없었다. 내성을 가지고 자라나면서 커져만 갔던 별이다. 마침내는 분화하는 양상까지 띄어 나중에 걷잡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지나 않을까 하고 순영은 지레 겁을 집어먹기까지 했다. 베인 살갗에 뜨거운 국물을 쏟아 부은 기분이었다.

순영의 눈에 별이 틔도록 한 것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살아온 삶이 다 그렇듯 멀쩡한 얼굴을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물들이게 하고, 한 순간에 먹구름으로 만들어버린 사건과 사고는 도처에 널려 있었고 시나브로 주변을 맴돌았다. 맛난 음식을 찾아다니거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기 위해 길을 나서는 웰빙생활은 언감생신, 어느새 웰다잉을 준비해야 하는 때에 다다른 것은 아닌가 하는 허망한 생각만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순영이 참아야 하느니라라는 말을 몸서리 처지게 싫어할 때쯤 모든 것을 놓아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순영은 그 순간을 차라리 기다리면서 잘됐다는 생각으로 주변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주방의 찬장 문을 열어제쳐 안 쓰는 그릇이며 접시, 컵 등을 모조리 쓸어다가 내버렸다. 그리고는 장롱을 열고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았던 옷이며 꺼내지 않았던 이불을 몽땅 치웠다. 허전할 것만 같았던 마음이 오히려 개운했다. 꽉 막혔던 도로에 서 있던 자동차가 움직일 수 있도록 갓길이 열린 기분이었다. 그 맛에 길들여진 순영은 이내 마음에 담아두고 묵혔던 짐들도 하나, , 끄집어내 몸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살아가는 목적은 가정을 꾸리며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일진대 엉뚱한 몸부림으로 스트레스만 쌓아왔다는 생각을 하니 후회막급했다. 언젠가는 쓰일, 집안에 필요한 물건이겠거니 생각하고 밖에서 주섬주섬 주워온 물건들이 어느 순간 쓰레기 되어 온 집구석을 뒤덮고 있었던 기분이었다. 남편이나 자식도 그렇지만 논문을 쓰려다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를 위하고, 무엇 때문에 쓰는 논문인지, 하고 따져보다가 내가 왜 자초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하는 깨달음이 일었다. 순간 순영은 한결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을 느꼈다.

"작은 것을 통하여 큰 것을 보아야 한다. 가지가 많이 벌어지나 그 근본이 하나인 것을 알아야 하며 가지가 벌어질수록 그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것은 근본에서 비롯됨을 알아야 한다. 본심은 불변하지만 물질은 변한다. 마음의 주체성은 천지일체(天地一切)의 근본이나 허망심(虛妄心)은 천지일체의 지엽(枝葉)이다. 그러므로 근본을 활용하여야 한다."

수십 년 간 심인당에 다니면서도 미처 마음에 새기지 못했던 이 법구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순영은 어리석었던 자신을 탓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