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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기도법

편집부   
입력 : 2015-11-02  | 수정 : 2015-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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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조사를 보면 불교도들은 기도가 어렵다고 한다. 사실 스스로를 닦고 깨닫는 수행과 간구하고 의지하는 기도는 서로 다른 차원의 일처럼 느껴진다. 가끔 불교식 기도법을 접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수행과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는 통성기도를 하는 기독교인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런데 고상한 바람도 드러내서 말하면 지나쳐 보이고 또 집착도 낳게 된다. 지극하되 속되지 않고 수행과도 조화로운 기도법은 없을까? 기도법의 원형을 찾아 안 가본 곳이 없다는 사람이 있었고, 그가 인디언 부족에게서 발견한 기도법이 곧 그러한 기도법이다. 

그렉 브레이든은 인디언 친구의 기우 의식에 초대를 받았다. 산 위의 성소에서 엄숙한 의례를 한 후 몇 분간의 깊은 기도와 함께 의식이 끝났다. (그 후 비가 왔었고, 인디언 기우제는 실제로 비가 오는 경우가 많아 ‘비가 올 때까지 기원한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거창한 주술을 예상했던 브레이든에게 인디언 친구는 “비에 대해 기도했지, 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비를 간청하면 가뭄에 힘을 넘겨주고, 치유를 요구하면 질병이 오히려 힘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비에 대한 기도는 “비를 느끼는 것이다. 몸에 닿는 빗방울의 느낌, 쏟아지는 비에 진흙투성이가 된 마을 광장에 맨발로 서 있는 느낌, 흙집 벽에서 나는 비의 냄새… 비를 맞으며 가슴까지 자란 옥수수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기분을 깊은 몰입과 집중 속에서 온몸으로 만끽하는” 것이라는 답을 얻었다.

해발 4,800m 티베트 오지의 사원에서 주지스님으로부터 “느낌이 곧 기도”라는 해답을 얻고는 브레이든은 말이 아닌 느낌의 기도가 기도법의 원형임을 확신하게 된다. 말은 사실 영적 소통방식이 아니다. 따라서 말을 통한 기도는 영적 존재에 공명을 얻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현대의 기도는 갈수록 적나라해지는가? 자본주의로 인한 세속화 이유도 있겠지만 브레이든은 4세기 이래 성경이 거듭 번역되는 과정에서 단순화되고 변질한 데서 원인을 찾는다. 비기독교인에게도 각인된 기원문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니…”는 원래 “숨겨진 동기없이 구하고, 너의 답으로 에워싸이고, 네가 열망하는 것으로 둘러싸이면 기쁨이 충만하리라.”였음을 밝히고 있다.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의 기분에 흠뻑 젖음으로써 기도가 힘을 얻게 됨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종교나 정령신앙들에서도 발견되는 이 기도법을 브레이든은 아름다운 ‘잃어버린 기도’라고 불렀다.  본래 모습의 기도는 응답 혹은 가피를 받았을 때를 세세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하여 마음속 열망이 실체가 되는 원리를 담고 있다.

지극해질수록 말의 기도와 느낌의 기도는 차이가 뚜렷해진다. 말의 기도는 속됨과 간절함, 의심과 무력감이 커지고 소통 채널은 더 닫히게 된다. 느낌의 기도는 성스러움과 충만함, 해방감과 감사함이 더 커지고 영적 소통도 열리게 된다. 달라이라마가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망명길에 오르면서 올렸던 기도는 “안전하게 여행 갔다가 안전하게 돌아오는 내가 보인다.”였다고 한다.

신재영 위덕대 교육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