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알기쉬운 교리문답

편집부   
입력 : 2015-10-15  | 수정 : 201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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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다른 이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요?

코끼리 한 마리를 놓고 시비를 벌이는 시각장애인들의 얘기가 있습니다. 그들이 싸우는 이유는 코끼리의 실상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한 마리의 코끼리를 두고 ‘빗자루와 같다’, ‘넓은 벽과 같다’, ‘굵은 지팡이와 같다’, ‘큰 새끼줄과 같다’ 등등으로, 자신이 만져본 부위가 전부인 양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부질없이 다투고 있는 거예요. 

앞이 보이는 이라면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의 문제를 놓고 싸울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중생들도 마찬가지예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박박 우기기에 급급하잖아요. 서로를 인정하면 싸울 일이 없는데, 자기가 옳다는 마음, 또 상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자꾸 시비가 붙는 것 아니겠어요? 

이렇듯 타인을 자기만의 고정된 틀에 끼워 맞추는 억지와 횡포를 서양에서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라고 부
른다지요.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름은 ‘두드려 맞추는 자’라는 뜻인데, 이 괴상한 악당은 길 가는 행인을 잡아 자신의 침대에 묶어놓고는 그 사람이 침대보다 길면 다리를 잘라버리고,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 길이만큼 온몸을 늘여서 죽여 버렸다지 뭡니까. 

잔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쩌면 우리 모습과 너무도 닮았어요. 열 마디 말 가운데 아홉 마디가 맞을지라도 칭찬하지 않으면서, 한마디 말만 안 맞으면 원망의 소리가 사방에서 모여드는 게 중생세간 아니던가요? 심지어 길 가던 어린 손자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대부분 할머니들은, “때치(touch?)!” 하며 돌부리를 탓하지, 절대로 손자를 탓하지 않더라고요.

너 나 없이 마음속에 무서운 침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애착과 편의에 따라 대상을 늘여서 내 침대에 맞추기도 하고 때로는 잘라서 내 마음의 침대에 맞추기도 하는지라, 모든 불화와 분쟁에는 틀림없이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개입해 있기 마련이거든요. 불교에서는 이 침대를 일러 ‘자기중심 생각’ 또는 ‘아(我)’라고 부르지요. 어떻게 하면 이 소아적인 기준을 버리고 조금 더 관대한 내가 될 수 있을까요?

진각성존 회당대종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일러주고 계십니다.
“나[我]를 버릴 것이다. 나[我]는 죄의 근본이며 인연의 근본이다. 참된 나[眞我]를 찾기 위하여 헛된 나[假我]를 버려야 한다. 맹장염에 걸려 수술해야 할 때 내 몸의 것을 떼 내고 수술을 해야 건강한 몸이 된다. 헛된 나를 버리는 것은 이 수술과 같다. 참된 나를 찾아야 한다.” (실행론 2-4-2 (다))

참된 나를 찾는다는 것은 자아의식, 즉 ‘자기(自己)라는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또한 자기방어본능으로 가득 찬 헛된 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방어본능이 너무 강하면 실수에 대한 부담이 커지고, ‘내가 무시당하면 안 되지’하는 부정적 관점에서 문제를 보기 때문에 더 크게 실패한다는 걸 알아야 해요.

중생으로 살지 말고 청정법신으로 삽시다. 회당대종사의 말씀 중에, 자성이 청정하면 청정법신이요, 자기 심성 이외에 구하는 것은 모두 외도(外道)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과실은 바위에 새기고 상대의 허물은 모래에 새길 줄 아는 은혜로운 진언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