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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와 해법이 동행하는 삶

편집부   
입력 : 2015-10-15  | 수정 : 2015-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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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프고 병이 드는 것은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것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몸이 보내는 의미심장한 신호입니다. 몸이 아프고 병들었을 때 질병의 인과를 간파하고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성찰하면서 인간은 성숙해집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것, 그냥 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몸을 아프게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몸이 아파서 내가 불편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나의 일상적 삶에 어떠한 하자도 없는데 몸만 아프게 되었다고 여기게 됩니다. 몸이 아프든 마음이 아프든 간에 아플 수밖에 없는 인과가 있고 그 원인은 대개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몸을 잘못 썼든 마음을 잘못 썼든 그 결과로 아픈 것입니다. 건강함은 내 덕이고 아픈 것은 내 탓입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몸만 보는 것은 경솔한 접근입니다. 사람의 성향이나 습관, 마음 상태 등을 보지 않고 몸만 보기 때문에 근본적 치유방법이 나올 수 없는 겁니다. 병의 인과를 무시하고 들어가는데 어떻게 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올바른 처방이 나오겠습니까.

병이 드는 과정이 있으면 나을 수 있는 과정도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의 인과를 외면한 채 병이 낫길 바라는 것은 욕심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간혹 불공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자신의 병을 회복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처음에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간절하게 불공을 시작하는데 막상 불공을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의 허물이 확연하게 드러남을 알게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불공에서 참회의 불공으로 극적인 방향전환을 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병들게 만든 원인과 병에 고통받는 인과를 직시하고 그것을 바로 잡고자 하는 순간이 진정한 참회의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병이 낫는 것이죠. 요컨대 병의 인과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순간 자신의 자생력과 자기 치유력이 작동하면서 병으로부터 회복된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이처럼 인과를 수용할 수 있을 때 자생력과 치유력은 작동합니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문제와 함께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삶의 진보와 성숙을 가져옵니다. 이 세상에 문제가 없는 곳은 자기 무덤뿐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바로 해답임을 헤아리지 못하고 깨닫지 못합니다. 문제를 보지 말고 삶의 원리를 바라보면 문제는 단지 신행의 숙제일 뿐입니다. 문제를 확대하지 말고 신행을 확대하면 문제가 해답이 됩니다.

걱정거리가 있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고민거리가 없다는 것은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문제는 어떤 고민을 하느냐입니다. 고민에는 심성을 갉아먹는 고민과 자기를 발전시키는 고민이 있습니다. 자기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기 위한 고민이 스스로에게 유익 되는 고민인데 반해, 상대와의 비교를 통해 생기는 걱정거리는 퇴보하는 고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많은 부분에서 유익하지 못한 고민에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문제에 당면하면 자기만의 불행이라고 속단하거나 운이 없는 결과라고 자책하며 문제의 본질을 간과해버린다. 평소에 신행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실제 시련과 역경이 닥치면 쉽사리 진리를 원망하거나 좌절하게 되고 신행의 공덕을 의심하게 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그저 인생을 즐기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살다 보면 사람이 왜 사느냐를 묻게 되고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는데 그 해답을 진리를 향한 신행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와 신행의 유익입니다. 배는 항구로 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사람도 세간에서 하염없이 헤매다가 언젠가는 진리의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는 곳이 많은 것 같아도 쉴 곳은 집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이 이 세상에 갈 수 있는 데가 많은 것 같지만 결국 인간이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일체의 본질 되는 자리 이외에는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두려워하는 문제나 고민에 대해서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은 결국은 진리와 신행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우리에게 가장 잘 맞는지 잘 모릅니다. 나의 미래가 어떻게 되는 것이 가장 좋은지 잘 모릅니다. 사람은 그런 것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지원력과 도움을 구한다는 것은 그러므로 내 머리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한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나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생각, 내 판단, 내 취향, 내 지식의 한계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잘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잘 되면 나머지는 당연히 잘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이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습니다. 계절마다 나는 과일이 다른 것처럼 사람도 피는 계절이 다릅니다. 그 사람이 성숙하고 열매 맺는 계절이 사람마다 달라요. 그러므로 우리는 남의 스케줄을 보고 긴장하고 염려하지 말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처럼 나도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지금 이 시절이 어떤 시절이냐 라는 것을 분별하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이 인내해야 할 시절, 공부해야 할 시절, 또 땅을 일궈야 할 시절, 빨리 거둬야 할 시절 아니면 지금은 뿌리고 심을 시절인지 잘 살펴야 하겠습니다.

밀각심인당 주교 수각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