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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심으로 보살행을 실천합시다.

편집부   
입력 : 2015-09-17  | 수정 :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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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존의 초전법륜 이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들은 출가한 사람도 있었고 불탑을 관리하는 재가수행자도 있었다. 불탑을 관리하는 제가 위주의 불교가 대승불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대승불교의 대표는 보살이라 하고, 이것은 보리살타의 줄인 말이다. 보리는 ‘깨달음’이란 뜻이고 ‘살타’는 유정이란 뜻이다. 즉 중생을 뜻한다. 그래서 보리살타는 ‘깨달은 중생’ ‘깨칠 중생’ 또는 ‘깨치게 하는 중생’ ‘보리를 구하는 중생’이란 의미가 있다.

대승의 목표는 성불이며 성불을 통해 법신을 증득하게 된다. 대승불교는 육바라밀 수행을 위주로 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자리이타의 실천을 강조한다. 불교의 수행은 보리심의 발원으로 시작된다. 깨달음을 얻고자 보리심을 일으킨 대승의 수행자는 모두 보살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보리심을 발하고 보살행을 하면 누구나 보살이라고 한다. 모든 유정들에게 부처님의 성품이 있으나, 번뇌의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는 여래장사상도 대승불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래장은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사상이다. 여래장은 감춰진 부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며, 자성의 청정심을 의미한다. 자성의 청정심은 근본적인 본성이 청정하다는 관점에서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다는 관점이며, 이것은 여래장과 상통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행자들의 수행 관점은 자성의 근본본성인 청정심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자성을 깨달아 가는 방법에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불성의 청정심에서 이것을 점점 확대하는 방법으로 향하문이라 한다. 둘째 번뇌를 제거하여 점점 불성으로 나가는 방법이며 향상문이라 한다. 향하문을 설하는 경전들은 여래장계경전과 ‘구경일승보성론’ 등으로 볼 수 있다.

보리심의 의미는 부파불교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작용하였으나, 대승불교에서 보리심은 마음에 따라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유심설로 발전하였다. 여래장은 법계법신과 중생에도 똑같이 존재함으로 어떤 중생에게도 여래의 불성이 있다는 것이다. ‘구경일승보성론’에 일체중생은 여래장이 있다는 것을 셋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법신불은 두루하고 가득 차 있으므로 여래법신이 일체의 모든 중생몸에 갖추어져 있다. 둘째 진여는 차별이 없으므로 여래와 진여는 차별이 없다. 셋째 일체중생은 모두 실상이 있어 진여불성이 있다.” 고 한다. 그래서 여래의 종자는 모든 중생 몸에 두루 한 불성이며 불성이 없는 중생은 없다. 불성의 종자는 보리심이고 보리심은 일체불법의 종자가 된다고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선남자야 보리심은 비유하면 종자와 같이 능히 일체의 제불법을 능히 생하게 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은 종자와 같이 일체법을 생하게 하지만 망집에 쌓인 사람은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싹이 터지기 전에 종자에서 꽃과 열매를 볼 수 없는 것처럼 수행으로 망집을 버려야 법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방광불화엄경’에 정진으로 지혜를 밝히면 여래장을 들을 수 있다고 설한다. “이와 같은 비밀법은 무량겁에도 듣기 어려우나 정진하는 지혜자는 이에 여래장을 듣는다.”라고 한다.

여래장은 망집에 덮여진 불성의 종자이며, 수행이 없으면 흙 속에 묻힌 보석일 뿐이다. 본성이 청정하다는 것은 본심이 청정하다는 의미이지, 현재 허망한 마음을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일체유정 실유불성이지만, 마음을 닦지 않으면 중생이라는 의미이다. 중생들은 보리심을 발하여 구도를 실천하면 불성을 발현한다. 수행이 없는 사람은 번뇌에 덮인 진여법성일 뿐이다. 실유불성이라고 하지만 보리심 발현에 따라서 불과의 결과는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보리심을 발하여 수행으로 지혜를 밝히고, 지혜로서 자성을 깨쳐서 성불에 이르게 된다.

불자 여러분! 보리심을 발하여 상구보리 하화중생 하는 보살행을 실천하여 성불의 본원을 성취하고, 불국정토 이룩되기를 서원합니다.

효명 정사/명륜심인당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