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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그리고 깊고 풍성한 이야기

편집부   
입력 : 2015-09-17  | 수정 : 2015-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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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달 전부터 새벽일을 나가고 있습니다. 새벽 세 시 반에 일어나서 상급자의 차를 얻어 타고 출근해서 네 시 반부터 일을 시작합니다. 네 다섯 시간을 화장실 갈 짬도 없이 일을 하고 나서야 간신히 직원식당에서 삼십 분 밥을 먹을 수 있는데 그나마 바쁜 날에는 국에 밥과 반찬을 같이 넣고 국그릇을 입에 대고서 마시듯이 밥을 먹고 곧장 일을 시작합니다.

며칠에 한 번 침을 맞아야 하고 피로회복제를 상용하면서 그야말로 “침빨”, “약빨”로 하루를 견디고 일주일을 견디고 한 달을 견딥니다. 그렇게 일생을 견디겠지요. 사실 명색이 ‘소설가’라는 사람이 이렇게 투정을 부리는 것도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군대를 갓 제대한 사회 초년생들도 낼 모래 환갑을 바라보는 여사님들도 발바닥에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 더 커다란 티눈이 박혀가면서도 절뚝거리지 않고 당차게 살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를 악물고서 말입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서인지 요즘은 인쇄된 글자들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작품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한국문학에 빚을 졌으니 독자로서의 몫은 충실히 하자, 결심했었는데 그 작은 결심 하나 지키기가 쉽지 않네요. 반성합니다. 반성해야지요.

지난 10일 밤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에서 열린 '교보 인문학석강'에 강연자로 나선 소설가 황석영(72세)씨는 “고흐의 그림은 그림으로서 잘 그렸나 못 그렸나보다 자기 인생과 세계관을 투여했기 때문에 감동이 있다. 소설 쓰는 일도 자신의 세계관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며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주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탐구하고 그 이야기를 자기화하고 필터링(여과)해 내놓는 것이 소설의 기본인 ‘서사’”라고 강조하면서 ‘문장’에 집착하는 현 문학계를 꼬집으면서 당신은 “예술교육”을 믿지 않는다고 단언하셨더군요. 최근에 나오는 소설집은 아예 제목조차 읽지 않고 있는 저를 대신하여 변명해 주는 것 같은 말씀인지라 신문에 난 기사를 모처럼 꼼꼼하게 여러 번 읽었습니다. ‘문장’을 추구하는 추세가 길어지면서 결과적으로 한국문학의 지평이 많이 좁아졌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거든요. 문장의 미학도 당연히 중요하지요. 그러나 소설가는 당대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주목하고 고민해야 하며 그 이야기를 맛깔나게 버무려 독자들이 재미나게 읽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야기 자체가 미학인걸요. 이야기를 통해 넓힌 인식의 폭은 쉬 좁아지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힘이 있습니다.

여과된 서사가 많아진 사회는, 아니 세계는 보다 더 깊고 풍성해지겠지요. 삶 또한 깊고 풍성해집니다. 아, 풍성한 계절입니다. 속이 깊은 소설 한 권 고르러 서점에 가야겠습니다.

이연수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