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알기쉬운 교리문답

편집부   
입력 : 2015-08-03  | 수정 : 2015-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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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해탈을 이루려면 어떤 불공을 해야 하나요?

춥고, 배고프고, 아픈 등의 육체적 통증[苦苦], 이별·파괴·멸망 등으로 인한 상실감과 정신적 고뇌[壞苦], 나아가 생멸하는 존재의 유한성으로 인한 숙명적 고통[行苦]에 이르기까지, 삼고(三苦)로 대표되는 중생의 고통은 이루 다 말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반드시 고(苦)를 수반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찾아서 매뉴얼화해 놓은 것이 불교라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촛불은 미세한 바람에도 반응하여 좌우, 상하로 끊임없이 나풀거리지요.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불씨는 마치 방치된 불쏘시개처럼 언제라도 바람만 닿으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재앙의 불길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네 인생, 흔히 바람 잘 날 없다고 하잖아요. 때로는 원망의 부채질을 하고, 집착의 기름까지 끼얹어가며 하루에도 몇 번씩 삼독(三毒)의 불길이 치솟는 걸 고스란히 두 눈 뜨고 지켜볼뿐더러, 가까스로 불길이 잡혀 진화되었다 손 치더라도 여전히 앙금과 그을음을 남기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 중생의 업연(業緣) 아니던가요?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왜 ‘열반’이라고 하겠습니까? 열반의 원어는 니르바나(Nirvana)로, ‘니르’는 ‘사라지다’, ‘꺼지다’ 등의 상태를 나타내는 부정적 접두사이고, ‘바나’는 ‘불’이라는 뜻이거든요. 따라서 니르바나라고 하면 ‘불이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눈앞의 촛불을 ‘후!’하고 불어서 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일순간 정적이 감돌면서 고요해지겠지요. 이와 같이 번뇌와 갈등, 망상과 분별이 찰나의 지혜로 소멸해버린 상태가 바로 열반이며, 해탈입니다.

그러나 발심한 이후로 무수겁[三阿僧祇劫]을 거쳐야만 성불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질 만큼 전통불교에 있어 해탈의 길은 요원하기만 했거든요. 쉽게 말해 거의 무한에 가까운 수행을 하지 않으면 성불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지요.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진각성존 회당대종사께서는 ‘옴마니반메훔’ 여섯 글자의 진언 염송을 통해 현재의 이 몸으로 성불을 이루는 현신성불(現身成佛)의 길을 내어 보이셨어요. 이는 곧 5분 행하면 5분의 성불이고, 10분 행하면 10분 성불이며, 한 시간 행하면 한 시간 성불이 되는 불공, 다시 말해 쉬운 방편으로 들어가 미묘한 진리를 체득하는 현대적 불공이었던 겁니다.

이렇듯 진각종은 산중에서 행해지던 기복적 전통불교에서 탈피하여,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이 몸 이대로 성불한다는 ‘생활불교’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실행론」의 다음 말씀을 통해 불법과 세간법을 별개로 보지 않으셨던 대종사의 사상을 음미함과 동시에, 진정한 해탈을 이루기 위한 불공이란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인지의 발달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다만 불상에만 국한하여 귀의하지 않고 우주만물 허공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경전이 따로 있지 않고 세상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공부를 잘하는 사람이고 불법공부를 잘하면 곧 세상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곧 생활불교의 본령(本領)이 되는 것이다. 또는 불공하는 법도 불공할 처소와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곳이라도 삼밀과 희사로써 불공하는 이의 일과 원(願)에 따라 그 불공하는 처소와 부처가 있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부처님이 없는 곳이 없으며 일마다 불공이 되는 것이다. (「실행론」3-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