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8

편집부   
입력 : 2015-07-16  | 수정 : 201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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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주의

"이원주의는 큰길이니 전문적이며 상대적이고 도회지와 같이 분업적이며 인의(仁義)가 대립이 되니 자주가 된다. 일원주의는 작은 길이니 겸하며 주종적(主從的)이고 벽촌(僻村)과 같이 자급적이며 인의가 겸하여 있어 자주가 되지 않는다. 이원주의에 일원이 있으니 삼권분립 중에도 통솔이 있어 대통령중심제로 통솔하는 것이다. 현대 물질시대는 이원주의를 세워야 한다. 이원주의 종교문(宗敎門)을 크게 열어서 세우는 것이다."('실행론' 제2편 제7장 제11절)

함께 사는 길


동네어귀를 휘감은 개울 물길을 따라 노랫가락이 느리게 흐른다. 권커니 잣거니 흥에 겨운 어르신들의 흐느적거리는 몸 동작은 마을회관 앞을 지키고 있는 굽은 소나무 마냥 휘어진 채로 얼비친다. 어르신들이 마을회관 안에서 그렇게 흥얼거림을 이어가는 동안 창수 또래의 중늙은이들은 굽은 소나무아래서 이야기꽃을 피워 올린다. 잔칫날 어른들이 집안에서 떠들썩할 때 아이들은 집 밖에서 구슬치기며 딱지치기를 하듯이 따로 놀았다. 농한기 청산리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밤 풍경이다.
“원산 아지매 집으로 누가 들어온다는 말이 있더만…….”
길만이가 걱정스러운 낯빛으로 말 마중을 했다.
“그런 이야기는 있는갑더라만 누군지는 아직 모르고?”
창수가 길만이의 말을 받았다. 이제야 다 지난 일이지만, 창수가 청산리로 들어와서 살겠다면서 몇날 며칠을 두고 동네를 들락거리자 마을 사람들은 그에게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두 사람만 모이면 창수 이야기였다. 죄를 짓고 숨어 들어오는 나쁜 사람은 아닌지, 식솔들은 몇이나 되는지, 무슨 일을 하다가 오는지, 와서는 뭣하면서 살 것인지……. 궁금한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았다. 창수의 동태를 살피려는 마을 사람들의 수군그림은 청산리를 벗어나 면소재지까지 금새 퍼졌다.
“나는 왜 쳐다보는데?”
창수는 그 때를 생각하면서 길만이를 뚫어 져라 쳐다봤다.
“아닐세. 그 때 생각이 나서…….”

워낙 조용하던 마을이었다. 그동안 그 어떤 외지인도 들어와서 살아온 적이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살기 좋은 고장이었다. 산천경계 좋고, 물 좋으며, 인심 또한 좋다고 자부심이 대단히 높았던 곳이다. 그 아무리 어렵게 살았던 보릿고개 시절에도 굶는 사람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완전한 천수답이 자랑이었고, 기름진 밭이 즐비했다. 집집마다 웃음소리는 들릴지언정, 싸움소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새나오지 않았다. 간혹 티격태격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그 소리는 담을 넘지 않았다.

장성한 아들이 있는 집안에서는 출가시킬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 결혼적령기에 접어든 아들이 있는 집은 어느 가정을 막론하고 이웃동네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회지에서까지 처녀들을 대동하고 중매쟁이들이 찾아들었다. 마당은 먼지 앉을 새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혼사를 두고 들락거리는 사람들로 늘 비좁을 정도였다. 장성한 딸을 둔 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장가를 들겠다고 찾아드는 총각들이 줄을 서기 일쑤였다. 저자거리가 따로 없었다.

무슨 이유로든 찾아드는 이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빈집은 여간해서 나지 않았다. 창수는 새로 집을 지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허가문제 등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것이 싫어 수소문을 하던 차 연평할머니가 도회지에 있는 아들네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면소재지 사람들에게 듣고 청산리를 찾았다.

“집을 사고 파는 기 개인적인 문제이기는 해도 마실 사람들한테 이야기는 해야될텐데 우짤꼬…….”
연평할머니는 외지 사람에게 집을 팔았다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을까봐 걱정부터 했다.
“뭐 하는 분이지예? 식솔들은 어떻게 되고? 뭘 하다가 올라 카는 기요? 여서 뭘 해묵고 살라꼬…….”
이장이라는 사람은 경계부터 하면서 동네 사람들을 대신해 묻는 것처럼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큰일이네, 큰일이야. 이제 우리 마을도 좋은 시절 다 갔삤는 갑다. 할매요, 차라리 이 집 내 한테 파소.”
그 때 옆에 있었던 길만이가 이죽거렸다. 
“아닙니다. 이 집은 꼭 제가 사야합니다. 이장님이나 동네 분들이 걱정하시는 바는 알겠으나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이곳의 좋은 땅에서 특수농작물을 재배하기 위해 군청까지 협조를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외지인들이 들어온다고 싫어하는 것은 알겠으나 외지인답게 행동하지 않고 빨리 청산리 사람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그러니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이 집을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집 문제가 어렵사리 해결되자 창수는 갖은 애를 다 썼다. 군청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준 덕분에 식재료로 많이 찾는 각종 채소류와 과실류를 재배했다. 한쪽에서는 실험적인 재배기술을 다양하게 적용하면서 시험삼아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전통농법만 고수했다. 논에는 벼며 보리를 심고, 밭에는 콩이며 고구마, 감자 등 윗대 조상들이 해오던 대로 고집하면서 창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인상 좋고 마음 따뜻하며 말씨 고운 창수를 경계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무시하지 않은 것만도 성공적인 안착이었다. 창수는 서두르지 않았다.

환경과 기술, 열정이 버무려지니 일년이 막 지나면서 결과가 나왔다. 그제야 마을 사람들이 창수네 논과 밭이며 집을 들락거리면서 대체작물로 분양해가기 시작했다. 그들도 영역을 점점 넓혀나갔다. 소득도 훨씬 좋아지면서 생활환경도 바뀌기 시작했다. 군청에서는 이때다 싶었던지 새로운 작물의 재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다. 군청에서는 한술 더 떴다. 연일 군내의 다른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 품평회를 열고 영농기술을 교육하기에 공을 들였다. 청산리에 새로운 바람이 분 것이다. 창수가 일으킨 바람을 타고 아예 눌러 앉아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길만이가 한 말처럼 ‘창수바람’이 일었다.
“그렇다고 청산리가 천산리가 돼서는 안 되는데…….”
“그건 또 뭔 소린가?”
“원산 아지매가 아들네로 떠나고, 또 누가 마을을 떠날 줄 아나 이 사람아? 그러다가는 외지 사람 천지가 되는 건 아닐지.”
“그렇기는 해. 연세들이 많으시니 이제 농사를 지을 수는 없고 하니 아들네네, 딸네네, 찾아가야지 어쩌겠는가?”
“빈집은 자꾸 늘어나고……. 걱정이네, 참말로 걱정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게. 외지 사람도 청산리에 들어와서 살면 청산리 사람이 되는 기지. 길만이 자네가 떡 버티고 있는데 뭔 걱정이래. 자네만 있으마 청산리는 끄떡없을 텐데 뭔 딴 소리야…….”
“예끼 이 사람아. 시방 날 놀리는 기제?”

길만이와 창수는 어깨동무를 한 채 마을회관 창틀에 얼비치는 어르신들의 어깨춤을 바라보며 노랫가락과 간간이 들려오는 추임새를 따라 서로를 쳐다보다가 한바탕 너털웃음을 지었다. 먼 산에 가로막혀 메아리로 되돌아 온 그들의 웃음소리는 청산리를 홰홰 떠돌았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