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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왜 가난합니까?

편집부   
입력 : 2015-07-16  | 수정 : 201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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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부유한 사람도 많고 가난한 사람도 많습니다. 가난과 부유함의 기준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사실 없습니다. 그렇기에 가난한 사람 중에는 실제로 재물이 없어서 절대적 빈곤을 겪는 사람도 있지만, 재산이 비교적 부족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가난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심리적 빈곤, 또는 상대적 빈곤이라고 합니다.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당신은 왜 가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해보면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가난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어서 가난하다 하고 혹자는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해서, 몸이 약하고 불편해서, 재수가 없어서, 남편을 잘못 만나서, 더러는 대통령이 정치를 잘못해서 내가 가난하다고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불자 중에는 지어 놓은 복이 없어서라는 얘기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인과로 본다는 점이 부처님의 제자답다고 여겨집니다.

가난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우리들의 삶을 지치고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러하기에 부처님은 “죽는 고와 빈(貧)한 고가 두 고통이 같은지라 죽는 고를 받더라도 빈궁하게 살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난의 근본 원인은 탐욕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의 원인을 자기의 탐욕심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흔히들 가난은 죄가 아니니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서로가 위로 합니다. 죄는 아닐지 몰라도 탐욕에 대한 인과임은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탐욕심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가 원하는 것에 욕심을 내어 그것에 집착하거나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하지만 우리 불자들에게 탐욕심의 정의는 ‘나의 것을 베풀지 않거나 나누지 않는 마음’이라고 함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베푸는 것은 복의 씨를 뿌리는 일이고 뿌려 놓은 것이 있어야 거둘 것이 있는 것은 너무나 자명한 인과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베풀지 않는다는 것은 나중에 거둘 것이 없다는 의미이기에 탐욕은 필히 가난을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으로 인한 가난의 대물림과 고착화를 경제구조와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이것이 개인 가난의 원인이라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이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부의 재분배를 통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합니다. 잘못된 제도와 부조리한 구조는 반드시 고쳐지고 개선되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며 믿고 따르는 불자들은 먼저 자기의 인연과 인과를 깨쳐가는 지혜가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완벽한 제도는 있을 수 없기에 세계 최강국 미국에도 매일 끼니를 걱정하고 굶주리는 사람이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하고 복지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에도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여전히 가난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은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옛말이 전혀 근거 없는 얘기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가난을 반드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국가가 게으르고 탐욕심 많은 사람들의 가난까지 해결해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앞의 예처럼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의 원인을 늘 외부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를 보면 난 가난하니까 남의 도움을 당연히 받아야 하고 남의 신세를 져도 괜찮다는 태도입니다. 당연히 없다는 핑계로 상대방에게 베푸는 데는 인색할 수밖에 없지요. 가난하니까 면제되고 적게 내도 되며, 받는 것은 조금 더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에게는 상식입니다. 가난이 사람을 점점 염치없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만듭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의뢰하고 의존하는 생활태도를 만들어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결국 살 수 없게 만듭니다. 가난한 사람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스스로 빠져서 복을 지을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콩 한 알도 여러 조각으로 나누는 것이 보시 정신입니다.

부처님 당시 걸식은 승단의 끼니를 해결하는 중요한 공양이었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걸식함에 가난한 집이라고 절대 피해가거나 건너뛰지 말게 하셨습니다. 가난하다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가난을 벗어나는 최상의 법은 베푸는 일 즉 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당대종사님께서는 “일체유정 미한마음 물사에만 쏠리므로 만유실체 못본자는 집착하여 전도한다. 현실밖에 없다하고 이익한데 집착하면 진리로서 요익한데 들어가기 어려우며 진리로서 이익하는 단바라밀 행해가면 지혜밝고 도량커서 미연의복 심게되고 미맹의화 끊게되어 현실생활 모든이락 금강같이 굳게하여 장원하게 이어간다.(실행론)”하여 목전에 이익에 어두워 베풂에 인색함을 경계하셨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또는 다른 목표가 있어서 등의 변명으로 베푸는데 인색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만약 내가 부유하다면 나는 넉넉하니까 더 많이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낌없이 베풀고, 만약에 가난하다면 더욱 복의 씨앗을 심겠는 마음으로 적극적으로 베풀고 나누어야겠습니다. 

선혜심인당 주교 대원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