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7

편집부   
입력 : 2015-06-17  | 수정 : 2015-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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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와 출가

"불교는 두 가지 사명이 있다. 출가는 전통을 이어나가는 법이며, 재가는 그 시대중생을 제도하는 법이다. 계승하는 출가법이 없어도 불교역사는 찾아 볼 수 없고, 교화하는 재가법이 없어도 그 시대에 악한 민속을 교화할 수 없다. 종교에서 자성일불공 하는 것은 우리 몸의 정맥(靜脈) 역할과 같고, 현실에서 엿새 동안 일하는 것은 우리 몸의 동맥(動脈) 역할과 같다. 출가불교는 먼저 무형중생을 제도하지만 재가불교는 유형중생을 제도함으로써 무형중생은 자연히 제도된다."('실행론' 제2편 제7장 제5절 가)

중심을 세우다

‘각서’를 썼다.
‘각서’라는 단어 밑으로는 몇 줄에 걸쳐 실천할 조항들을 나열했다. 첫째, 3년 내에 부부 공동명의로 된 45평 이상의 아파트를 마련한다. 둘째, 집안의 각종 경조사에 있어 참석은 하되 일체의 허드렛일은 하지 않는다. 셋째, 시댁 식구들은 부부가 동의하기 전에 어떤 경우라도 집안을 함부로 들락거리지 않는다. 넷째, 기타 각종 현안문제가 발생할 때는 부부의 절대적인 동의 아래 모든 일을 처리한다.

성철은 아영이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장차 장모가 될 아영이의 어머니가 부르는 대로 받아쓰기를 하듯이 각서를 써내려 갔다. 그리고는 날짜를 적고 ‘김성철’이라는 이름을 쓴 뒤 지장을 찍었다.
“공증을 해놔야 하지 않을까?”
아영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공증까지는 할 필요 없어. 김 서방 인품을 믿고, 체면을 생각해서 공증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지, 김서방!”
“그럼요. 믿으셔도 됩니다.”
성철의 대답은 짧았다. 얼굴을 붉히거나 화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이었던지라 무조건 참아내기로 작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됐네. 나는 가볼 때가 있어 먼저 가네 만, 아영이 저녁에 일찍 들여보내게.”
성철은 아영이 어머니가 각서를 갖고 자리를 뜨자 고개를 떨구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겁이 났다.
“왜, 당신, 겁나? 싫으면 지금이래두 그만 두시던가…….”
아영이와 장모 될 사람이 이렇게까지 하고 나선 것은 성철이 잘못이 컸다. 무남독녀로 곱게 자라 공주대접을 받던 아영이를 성철이가 꺾어 놓았던 것이다. 도망칠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옭아매어진 성철은 그토록 매달렸던 결혼을 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각서는 각서고, 조건은 조건일 뿐이다. 둘이서 오순도순 잘 살면 모든 것은 그만일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다. '사랑의 징표'라 여기기로 하고 나니 한결 마음도 가벼워졌다.

아영이를 돌려보내고 집에 도착한 성철은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놓고 서재에 앉았다. 아영이와 장모 될 사람 앞에서는 내색할 수조차 없었던 설움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섧은 마음이야 또 그렇다 치고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감당해낼 수 있을 지에 대한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한 집안의 며느리가 제사 때며 명절에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아영이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좋다고 졸졸 따라 다녔을 때는 그렇게도 상냥하고, 부드럽고, 여리고, 정 많고, 무슨 일이든 겁내지 않았던 아영이가 아니었던가. 사귈 때와 달리 결혼을 앞두고 달라도 너무 달라진 아영이가 이해되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장모가 될 사람 탓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영이가 아니라 장모 될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오히려 문제는 간단할 것 같았다.

“얘, 너, 이게 뭐니?”
복사를 한 각서 한 장을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채 넋을 잃고 있던 새 방으로 들어온 어머니가 본 것이다.
“뭐, 말도 안 돼. 이 결혼 못한다. 너, 이 결혼하면 평생 후회할 거다. 엄마는 절대로 결혼 반대다. 뭐가 어째 고 어째. 길을 막고 오가는 사람들한테 다 물어봐라. 이게 말이 되느냐고?”

어머니는 잔뜩 화를 내면서 방문을 콱 닫고는 나가버렸다. 성철은 그 때까지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어머니를 바라보기만 했다. 맞다 거나, 틀렸다거나,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어머니 표현 마냥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일 수밖에 없었다. 설사 어머니가 머리채를 잡아 흔들거나 옷을 다 벗겨 밖으로 내쫓으려 했을지라도 저항은커녕 온 몸을 내맡기고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을 것이다. 아영이와의 결혼이야기 뿐만 아니라 그동안 태어나고 자라면서 뜻을 그르치고 말을 듣지 않았으며 속을 썩였던 벌을 한꺼번에 받는 기분이라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들을 낳은 뒤, 어릴 때는 그렇다 치고 성년이 된 후에 어머니에게 어떻게 하겠다고 각서를 쓰라고 했으면 과연 순순히 썼을까? 성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땅에 자식된 어느 누구라도 하지 않을 일이며,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헛웃음이 나왔다. 죄 많은 것이 부모라고…….

자식은 아직 없지만 자기 몸과 아영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의 반에 반만큼이라도 부모를 알아주고 대했더라면 하는 북받치는 서러움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단단하게 뭉쳐진 가래덩어리 같은 것이 목을 타고 올라와 입 속에 고였다. 시큰한 맛이 나는 게 기분을 잡치게 했다. 혀로 이리저리 굴리다가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 속에 뱉어 놓고 나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인지, 연민인지 종잡을 수 없는 애틋함이 손에 잡힐 듯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날이 시퍼런 두 개의 칼날 양단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한쪽으로 쏠리는 순간 어느 한 발에서는 피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 성철은 머리통을 감싸쥐었다.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으면 되리라,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영이의 편만 드는 것도 아닌, 훌륭한 중재자로서의 입장에서 무게중심을 잡고 바른 처신을 하는 길밖에 없다는 소신을 갖게 된 것이다. 생각이 정리되고 마음이 발라지니 더 이상 괴로워만 할 일도 아니고, 머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치며 선언한 것도 누구나 스스로 중심을 잡고, 각자가 주인으로 살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 느닷없이 생각이 거기까지 닿은 것이다. 책상에 머리를 처박은 채 고민하고 번민했던 것이 후회되기까지 했다.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성철은 모든 것이 제 잘못인양 참회가 됐다. 어머니를 이해시키지 못했고, 아영이가 가진 생각을 제대로 헤아릴 줄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인연을 지어왔기 때문이라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처럼 번져나는 참회가 일었다. 삶의 중심은 각자이니 스스로를 단속하면서 바른 생각으로 바른 행동을 하고 바른 길을 간다면 만사는 그의 뜻대로 일어나고 움직이는 것이 진리일지니……. 성철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두 팔을 쭉 뻗어 기지개를 켰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만면에 미소가 번졌다. 무거웠던 머리를 한쪽으로 돌리니 그곳에서는 어머니가 함박웃음을 짓고 서 있었다. 또 다른 쪽으로 머리를 돌리니 아영이가 배시시 눈웃음을 치고 서 있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두 사람이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