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제 정사-알기쉬운 교리문답

편집부   
입력 : 2015-06-01  | 수정 : 201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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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가요?

뿌연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기어가는 시골버스보다는 당연히 아스팔트를 구르듯 달리는 도심의 버스가 빠르고 편리하겠지요? 운행 간격도 촘촘한 편이니까 많이 기다리지 않아서 좋구요. 하지만 시골버스만의 정겨움이 우리들 기억 한 켠에 자리 잡고 있는 건 왜일까요? 그건 바로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서랍니다.

시골 사람들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아는 사람’을 찾지만, 도시 사람들은 제일 먼저 ‘빈자리’를 찾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시골 사람들은 연신 웃음을 머금고 구수한 얘기꽃을 피우며 가는 반면, 도시 사람들은 자기 자리만 찾으면 그만이기에 고개 숙여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가 목적지에 내린다는 겁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갑각류처럼 말이죠.

한편으로는 자기를 가장 먼저 배려하고 온전하게 느끼는 일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남의 시선, 외부 환경은 모두 그 다음이지요. 단체사진을 볼 때 그 사실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사진이 나오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먼저 하는 일은 내가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일 테지요. 자기 얼굴을 찾은 뒤라야 친구 얼굴, 선생님 얼굴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거든요.

이렇게 모든 일을 ‘나’ 위주로 생각하는 자아 중심적 경향은 마치 팔이 안으로 굽는 것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자리(自利)’가 되어야 ‘이타(利他)’도 되지 않겠어요? 나도 내 나름대로 잘 살고 있어야 하고, 남도 남대로 잘 살게 해줘야 해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건 ‘호위호식’에 불과하지만, 남들까지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다면 그야말로 ‘웰빙[well-being]’인 거잖아요.

이처럼 불교적으로 볼 때 정말로 잘 사는 길은 바로 ‘자리이타’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겁니다. 다른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보살의 자리이타 정신이에요.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법이 원래 다 구족되어 있음을 안다면 혼자는 혼자대로 좋고, 대중과 만날 때는 만나는 대로 좋은, 그야말로 나날이 좋은 날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이타’는 안중에 없고 ‘자리다툼’에만 급급한 이들이 적지 않아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한 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데만 몰두하는 경제 인간을 가리켜 ‘합리적 바보(rational fool)’라고 지칭합니다. 합리적 바보가 되지 않는 비책, 간단해요. 세상에는 ‘나’도 있지만 ‘남’도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각성하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가 다른 이들의 은혜 속에 살려지고 있다는 연기(緣起)의 진리를 체험적으로, 때로는 명상적으로 자각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가위 바위 보’ 해 보셨지요? ‘바위’가 이깁니까? ‘보’가 이깁니까? 네, 그렇습니다. 혼자 가지려고 꽉 움켜쥔 ‘주먹’은 나눔과 베풂의 ‘보’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요. 남에게 먼저 베풀고 먼저 다가가는 일은 사실상 우리가 자기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일이에요. 왜냐하면 남을 사랑하고 보살피고 돕는 데서 자기 자신을 보살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되기 때문이지요. 거기에서 우리는 비할 바 없는 기쁨과 존재의 환희를 느끼게 되거든요. 이것이 바로 너와 나, 우리는 둘이 아니라는 불이사상(不二思想)이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정신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