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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길

편집부   
입력 : 2015-05-15  | 수정 : 2015-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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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입니다. 계절의 여왕답게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신록은 푸르름을 더해갑니다. 또한 가정의 달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 진언행자들에게 오월은 부처님 오신 날과 종조님 탄생절, 대각절이 있는 참으로 기다려지고 의미 있는 달입니다.

성인의 탄생은 우리 무명중생에게 큰 광명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고 더욱이 저 같은 미욱한 중생에게는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의 학창 시절 동아리 선배님 중에는 아주 재미있는 분이 한분 있었습니다. 매주 주말 열리는 정기집회에 선배님들이 아주 오랜만에 참석하시면 사회자는 인사말씀을 부탁합니다. 그러면 그 선배님은 여러번 사양하시다가 후배들의 간곡한 성원에 마지못해 일어나서 인사말씀을 하십니다.

“에~ 그럼 미천한 제가 하찮은 여러분에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라고 시작하시면 집회모임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어버립니다. 금지옥엽같은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한순간에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켜버리는 무례를 일으켰음에도 모두들 재미있다고 난리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후배들에게 항상 존경의 대상인 대선배님도 스스로 자신을 미천한 존재로 낮춤으로서 그 자리의 하찮은 우리 모두는 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사람의 심리 가운데에는 누구든지 함께 가는 길이라면 아무리 험난한 고생길이라도, 총알이 빗발치는 참호속에서 피어나는 전우애처럼 비록 죽음의 길일지라도 기꺼이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려운 처지나 입장에서 서로가 마음을 공유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고 고귀한 가치입니다. 아마 선배님 입에서 “훌륭한 제가 하찮은 여러분에게~”라거나 “하찮은 제가 훌륭한 여러분에게~” 또는 “위대한 제가 훌륭한 여러분에게~”라는 말이 나왔다면 다들 마음속으로 ‘뭐야 왜저러시지’라는 기분이 찜찜하거나 아님 별 반응이 없었을 것입니다.

위대함은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그 낮아지는 만큼 뚜렷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약 2560여 년 전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꽃비가 내리는 이 계절에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시고 출가하시어 고행을 통해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것은 일대사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룬 후에 그 내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파하기를 주저하셨다고 하는데, 자신이 깨달은 진리가 너무 심오하고 난해하여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갈등이 율장『비나야』의 <대품>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행 끝에 이룬 깨달음을 과연 지금 어떻게 설할 수 있겠는가? 욕망과 분노심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며, 미묘하고 심원하기 때문에 탐욕과 암흑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염려에도 불구하고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홀로 출가한 싯다르타 왕자가 붓다가 된 7일 후에 다시 대중 속으로 스스로 몸을 낮추어 들어가신 것은 중생과 고통을 함께하고자 하는 위대한 자비정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진리의 가르침(초전법륜)을 전하시고 이어서 60여명의 제자들에게 ‘전도의 선언’을 하셨습니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에서는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미 해탈을 얻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사람의 안락을 위하여 전법의 길을 떠나라. 마을에서 마을로,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으며 끝도 좋은 법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법하여라’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제자들에게 계율을 엄격히 정하여 가장 청빈하고 겸손하며 낮은 모습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며 중생들 속으로 젖어들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법륜이 굴러온 지 어언 2450여 성상(星霜)이 흘러 동쪽 땅 울릉도 성인봉의 정기(精氣)를 타고 이 아름다운 오월에 회당 대종사님께서 우리 곁에 오시어 농림촌에서 대각을 성취하시고 이송정에서 초전법륜을 전하심은 다시 찾아 온 일대사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종조님의 대각은 다름 아닌 은혜에 대한 자각이셨고 그 은혜는 실상같은 자심참회로 이어지고 심인진리로 이어졌습니다. 심인진리로 진각종문을 개창하신 순간부터 침산동 불승심인당에서 열반에 이르실 때까지 대종사께서는 오로지 가난과 질병, 불화 등으로 고통 받는 중생을 위하여 평생을 스스로 청빈한 모습으로, 겸손과 하심(下心)으로 대중의 삶속으로 뛰어들어 같이 울고 웃으며 상대자의 허물은 당신의 허물로 아시고 참회의 눈물과 정진으로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참회는 하심입니다. 낮아지는 것입니다. 낮아져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참회하는 사람이 어깨에 힘주고 고개를 빳빳이 드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중과 같이 어울릴 수 있었고 마음을 같이 나눌 수가 있었습니다.    

참회는 시작과 중간과 끝을 한결같이 하나로 통합하고 해결하는 미묘한 공덕이 있습니다. 하심으로 참회하는데 원인과 과정과 결과가 하나 되어 고통을 해탈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참회의 가르침과 공덕은 대종사의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처님과 회당대종사의 자비심을 불기 2560여년과 종조탄생 110여년이 지나는 오늘날 이 땅에 풀어 놓기 위해서 앞선 시대의 성인들께서 스스로 낮은 곳으로 임하신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 하심과 참회로 고통받는 이웃에게 기꺼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부처님과 종조님 오신 길에 동행하는 위대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선혜심인당 주교 대원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