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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심양면(物心兩面) 완전공덕(完全功德)의 조건

편집부   
입력 : 2015-04-16  | 수정 : 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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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해 한반도를 휘몰아 쳤던 세월호 사건은 한국 사회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난 사건입니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 사회의 부끄러운 속살 말입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한국 사회의 부패와 무능함은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그렇게 추악한 민낯의 한 면은 바로 돈에 대한 탐심입니다.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돈이었습니다. 한국 사회가 돈을 얼마나 최상의 가치로 섬기는지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세월호는 이익을 위해 화물을 과적했고, 화물을 과적하기 위해서 배의 안전을 좌우하는 평형수를 줄였습니다. 평형수는 배의 안전을 좌우하기 때문에 생명수로 불렸습니다. 그 생명수를 줄이면서까지 이익을 늘린 것입니다. 이렇게 돈에 대한 탐심은 안전을 삼켜 버렸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와 존엄조차 다 삼켜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돈에 대한 후안무치한 탐심이 그 사건을 일으킨 중요한 원인이었습니다.

돈에 대한 탐심은 단지 한 개인의 도를 넘는 욕심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에 대한 탐심은 개인의 욕심과 그릇된 사회구조의 합작품입니다. 과도한 개인의 욕심이 정의롭지 못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를 초래합니다. 더불어 불의하고 불평등한 사회구조는 도를 넘는 개인의 욕심을 정당화시켜 줍니다. 이렇게 탐욕으로 점철된 개인과 사회의 합작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제하라는 식의 개인의 도덕만 강조해서는 돈에 대한 탐심의 문제를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탐심에 물든 인간이 살고 있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구조도 함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세상이 그릇한 물질관에 전도되도록 방조한, 아니 심지어 조장한 종교의 부주의함도 자책해야 하겠습니다. 자본주의에 그릇되게 물든 이 세상의 종교는 신자들이 세간적으로 성공하길 간절히 빌어주고, 그들이 성공하면 그들의 신앙심을 격려하고 축하합니다. 하지만 성공에 이르는 과정이 과연 정의로웠는지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도록 진지하게 권고하는 것에는 외면했습니다.

우리가 서원하는 물질해탈, 가난해탈의 원력은 한 개인이 스스로 신행생활만 잘하기면 하면, 비록 그가 불의한 사회구조 속에 살더라도, 그리고 그 불의한 사회구조 속에서 다른 많은 이들이 가난의 구렁텅이로 떨어질지라도 신행자 스스로 만큼은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이 아닙니다. 그런데 물질공덕은 이런 점들을 외면하고 부처님의 가피를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둔갑시켜 신행자의 탐심을 자극합니다.

진정한 나눔과 베품은 신행자 자신이 물질해탈의 공덕을 성취했느냐와 상관없이, 오직 이웃중생을 향한 자비와 사랑 때문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베풀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막론하고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내세우는 순간 나눔과 베품의 진정성은 무너지고 맙니다. 베풀기 위해서 먼저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비록 남보다 좀 가난하다 할지라도, 부자보다 더 의미있는 나눔과 베풂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돈은 그냥 돈일 뿐일까요? 중립적인 돈이 착한 부자에 의해 선한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존재가 아닙니다. 돈은 인간의 욕망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 밀착도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돈은 인간과 관계를 맺는 순간 단순히 중립적인 물질이라는 차원을 넘어서게 됩니다. 우리의 가치관, 인격 그리고 심지어는 신행의 내용까지 변질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지요.

우리 스스로가 수행과 신행의 힘으로 돈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굳게 믿을 수 있는가 자문자답하게 됩니다.

우리 진언행자들은 돈을 버는 과정에서 정직하고 정의로워야 함과 동시에 쓰는 과정도 그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경제적인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하자없는 물질의 운용을 위해 복덕의 근본으로의 희사행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의 수입의 일부를 희사하더라도 좋은 차, 좋은 집에 여유있게 살 수 있는 형편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제적인 여유의 유무를 떠나 우리가 희사심을 일으키는 데 유의해야 할 점은 희사행을 통해 나의 소유의 일부를 나누었으니 남은 내 몫은 멋대로 써도 괜찮다는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한 희사(20%)가 나머지 내 몫 80%에 대한 무절제한 누림의 권리를 신행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사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입니다. 무아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마음[相]이 제거된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과 자신의 소유물에 대한 집착이 강하면 강할수록 남에게 베풀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희사심을 일으켰기에 무아의 실천을 이루었다고 속단할 수 없습니다. 심인당에 희사한 것 뿐만 아니라 희사하지 않은 소유물까지도 희사의 정신에 입각하여 세간에 쓰여질 때, 비로소 온전한 희사행이 구현된 것 아닐까요.

밀각심인당 주교 수각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