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5

편집부   
입력 : 2015-04-16  | 수정 : 2015-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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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을 닦아라

"불법(佛法)이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 가운데 선량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곧 불법이다. 항상 자성을 닦으며 밖에 있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모든 것은 안에 있으니 밖에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불교는 빌고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이다."('실행론' 제2편 제4장 제5절 가)

마음의 눈을 얻다

숱한 방황이 이어졌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막막했다. 끝이 어디쯤인지, 언제일지는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터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너져 내린 지하 깊숙한 갱도에 갇힌 것에 다름 아니었다. 마음으로 느끼는 답답함도 숨막힐 지경이었지만, 짐짓 몸을 짓눌러오는 주변 분위기가 소리 없이 가하는 중압감은 해머로 짓찧은 나무줄기처럼 터지고 찢기어 너덜너덜해질 지경이었다. 잘 찧은 초피나무 뿌리는 종종 얕은 웅덩이나 개울가에 풀어놓아 물고기를 기절시켜서는 잡는데 쓰이기도 했지만, 만신창이가 된 맨몸뚱이는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을 듯 싶었다. 하다 못해 쓰레기보다 못해도 한참은 못하다고 생각됐던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용지물’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그러한 인물로 자학하고 치부하던 나날이 무시로 이어졌다.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고 숨쉬는 송장 없다고 했다. 나락으로 떨어진, 볼품 없고 형편없는 위인으로, 밥만 축내며 연명하고 있을 때였다. 한 시각이 길고, 하루가 멀던 시절이었다. 그때 순간적으로나마 한줄기 빛을 보았다. 그 순간만큼은 반드시 되돌리고 싶은 찰나였다. 꿈을 꾼 것도 아니었는데, 한 순간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진 이가 있었다. 그를 좇아 맨발로 뛰쳐나가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순식간에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었다. 순간에 맞닥뜨리고 순간에 멀어지고……. 그야말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지고 마무리됐다. 죽은 이처럼 맥을 놓고 있다가 한달음에 용수철처럼 몸을 퉁겨 바깥으로 내달렸던 힘이 어디서 솟아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있느냐. 떠나라. 네 길을 찾아서 떠나거라.”
어디를, 어떻게……. 길을 가르쳐 줄려면 제대로 일러주던지……. 말 같지 않은 말을 불쑥 뱉어놓고 그림자처럼 사라진 이의 뒤통수를 향해 푸념을 늘어놓았다. 연결되지 않는 낱말을 맞추듯이 낮도깨비처럼 마주쳤던 위인이 흘려놓은 몇 마디의 말을 주워 담아 꿰어보려고 갖은 노력을 해봤지만 이해는커녕 점점 의문만 쌓여갔다. 헛소리리라, 환영을 본 것이리라, 단정하며 벽을 타고 미끄러져 내리듯이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무량 스님이 출가의 길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의 일이었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길을 나서서는 무거운 발길이 머무는 곳, 그곳이 길의 끝이려니 작정하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사찰에서 시작한 생활 역시 갈팡질팡했다. 속가에서의 삶이 고단했던 만큼 사찰에서의 생활도 만만찮았다. 처음에는 내딛는 발걸음마다 진흙탕이기 일쑤다 보니 어디에 발을 내려 놓아야할지조차 모를 정도로 암흑천지를 헤매고 있는 기분이었다.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간 곳에서 간신히 몸을 빼내 평탄한 길인가 싶었을 때엔 산꼭대기로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숨이 차고 가슴이 아려 더 이상은 한 걸음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됐다. 몸이 먼저 무너져 내렸다. 마음 또한 천근만근 짓눌려오는 처참함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허물어졌다. 바람 앞의 모래언덕이 순식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양을 바꾸듯이, 몸과 마음 가릴 것 없이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듯 했다. 산화, 바로 그 지경이었다.

무량 스님은 은사스님을 떠올렸다. 수행공부에 진전이 없어 지게를 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던 은사스님의 전설 같은 이야기는 잊을 수가 없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 지남이 되고 용기를 북돋워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수행공부를 내팽개치고 산으로 올라간 은사스님은 힘에 부칠 정도로 나무를 한 짐 해서는 터덜터덜 가파른 산길을 내려오다가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 순간 나뭇가지에 눈자위가 찔린 것이다. 아프기도 했지만 눈을 뜰 수조차 없어 몸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더 이상 세상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행공부에 차도가 없는 점을 생각하며 차라리 잘됐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괴롭던 차라 모든 것을 단념하고 싶었던 바도 있었다.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새 빛을 찾아낸 것은 그 때였다. 어두컴컴한 실내로 얼비친 햇살이 안팎을 분간해 주듯이, 경계 밖의 다른 세상이 있음에 눈떴다. 그때 본 것은 마음 밖의 다른 곳이었다. 무릉도원도 아니고, 이상향도 아니며, 샹그릴라는 더더욱 아닐 뿐더러 유토피아도 아니었다. 마음의 경계를 넘어선 곳, 집착을 놓아버린 자리였다.

은사스님은 그렇게 당한 사고를 딛고 몸을 추스른 뒤 마을로 내려갔다. 사하촌에서는 농사철마다 일손이 부족해 난리들이었다. 스님은 어느 집, 어떤 일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스님이, 그것도 앞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일을 하겠느냐고 핀잔을 놓던 이들도 나중에는 스님을 서로 모시려고 난리들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고 사찰로 돌아온 날은 수행공부에도 진척이 있었다. 옛 조사스님들이 했다던 주경야선의 경지를 넘나들면서 즐기기까지 한 것이다. 농사철이 끝나거나 일이 없을 때는 아이들이 있는 집을 찾아가 동무가 되어 나뒹굴고 놀면서 숙제하는 것을 도와주고,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무량 스님이 출가를 결심하고 집을 나섰던 때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시기였다. 어린 나이였다. 맨몸뚱이 하나뿐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너무 많이 가진 것 같아 괜스레 미안한 마음도 들어했다. 공부가 되지 않는다고 자책하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럽기까지 하다고도 했다. 다 버리고 살아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태 버리지 못한 채 붙들고 있는 욕심 덩어리가 원망스럽기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껍데기에 집착해온 삶이 후회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은사스님이 사무치게 그립다는 것은, 공부가 무르익지 않아 은사스님을 닮고 싶은 열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무량 스님은 은사스님을 그리워하며 툇마루에 앉아 봄 햇살을 즐겼다. 때마침 아른거리는 것이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느낌이었다. 일상에 지치고, 상념에 젖어 하늘 한번 제대로 올려다본 적이 언제였던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지랑이가 눈앞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지랑이를 좇아 천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산과 들판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던 어릴 적 추억도 몽글몽글 떠올랐다. 아지랑이에 정신이 빼앗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툇마루에 앉아 있던 무량 스님은 추억 속에서 빠져나와 먼 산을 바라보았다. 산색이 바뀌고 있었다. 갖가지 봄꽃이 제 스스로의 기품을 자랑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은사스님이 선방을 박차고 나가 사하촌에서 일상의 생활을 즐기면서 오히려 수행의 고삐를 다잡을 수 있었던 것도 굳이 경계를 구분 짓지 않고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가림 없이 대했던데 근원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현실을 벗어난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스로를 잘 관찰하고 다스리는 것이 마음공부의 시작이고 완성이리라. 봄 햇살 속에서 가득 피어오른 아지랑이가 가져다준 깨달음이었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