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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을 받을 자격

편집부   
입력 : 2015-03-16  | 수정 :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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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좋아하고 원한다.

그래서 여기저기 어딜가나 복을 많이 짓고 복을 많이 받으라고 권한다. 오늘도 전국의 사찰이나 기도처 그리고 성당과 예배당 등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복을 빌고 기도한다. 당연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복을 말한다. 불교는 복만을 추구하고 강조하는 종교가 절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복 짓기를 강조하거나, 복을 구하고자 하는 많은 불자들의 신앙 행태로 인하여 불교는 기복불교라는 원치 않는 타이틀과 잘못된 인식이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왜곡되고 비판 받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예전에 어느 큰스님은 “기복불교는 불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중생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꼭 이루기 위해서나 또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복이 찾아오기 바라는 마음을 어찌 탓할 것이며,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상황이 어떻든 간에 복을 짓고 받는 일이 생각처럼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복을 짓는다는 것이 대부분 은근이 욕심만 앞세워서 더 많이 받기만을 바라며 불공을 부처님과 거래하듯이 여기는 기본 상식을 벗어난 경우도 다반사이다.
누구든지 복도 제대로 구하는 방법만 알고 실천한다면 불교가 기복적 종교라고 비난 받을 일도 별로 없을 것이다.
어느 각자님의 반문(反問)처럼 “복 짓고 받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합니꺼? 그냥 무조건 희사하고 염송하면 되는 거 아닙니꺼!” 그렇다 당연히 옳으신 말씀이다. 흔히들 우리가 조건 없는 사랑! 즉 무조건적인 사랑이 순수하고 참된 사랑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불공하는 것도 조건이 없는 것만큼 더 이상 훌륭한 조건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든지 무조건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자면 목표와 서원은 필수적이고 이를 위해서 발심하여 불공하는 가운데 의도적이고 계산적인 마음이 앞선다면 결국 조건 없는 순수성은 훼손되고 만다.

세속적인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상대방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나에게 잘해주거나 계산적으로 접근한다면 누구든지 거부반응이 일어나고 마음이 상할 것이다.
이렇듯 세간의 입장에서나 인지상정(人之常情)으로 보더라도 욕심과 의도로써 뭔가를 바라고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결코 아니다. 하물며 부처님 전에 불공하는 일에 있어서도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에 때때로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황을 바라보게 되면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일 때가 많다. 내가 역지사지로 부처님의 입장에 서서 자기의 마음을 여실히 들여다본다면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자기의 이익을 앞세우는 기복적 신앙형태는 분명 뭔가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자 자비의 종교이다. 앞뒤 볼 것도 없이 복만 구하는 어리석은 중생이 깨우쳐야 할 것은 먼저 실상같이 자기의 마음을 살펴보는 일이다. 청정한 마음으로 돌아가 자신을 살펴 볼 일이다. 청정한 마음은 무주상이 되어서 복의 근원이다.
보시를 하여 복을 지음에도 청정하여야 함에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과 보시하는 물건이  청정하여야 한다는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복을 많이 받고자 한다면 복그릇을 키워야한다고 얘기한다. 당연한 이치다. 큰 복그릇을 만들어야 한다. 물론 복의 그릇은 절대로 욕심으로 커지는 것이 아니다 .욕심을 일으킬수록 복의 그릇은 더욱 작아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복의 그릇은 곧 마음의 그릇이다. 일체중생을 가득 담을 수 있는 慈悲心의 그릇으로 키워야한다. 심일당천만(心一當千萬)이라, 마음 하나가 천만을 당적하고, 즉 마음 하나가 천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불법(佛法)이요 심법(心法)이다. 질백화단청(質白畵丹靑)이라,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바탕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그려 넣을 수 있다.

복이란 단순히 내가 원한다고 해서 또는 욕심만 낸다 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
회당대종사님 말씀처럼 동쪽이나 서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 안에서 솟아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실행론 말씀에 “복을 구하기 위해 외도에게 경을 읽고 물을 떠 놓고 빌겠는가. 남녀노소 막론하고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며 탐심을 없애기 위해 희사하고 지혜를 밝히기 위해 정진해 나가면 이 가운데서 복이 솟아난다”라고 하셨다. 마음 밝히는 수행이 되면 복은 원치 않더라도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내 마음에 부처님이 계심을 알지 못하고 바깥으로만 부처님께 끊임없이 요구하는 어리석은 신행을 그치고 이제는 조건 없이 비우고 내려놓으며 심인(心印)을 찾아가는 신행이 되어야 한다.
진언행자들이 항상 매일 아침마다 해오고 있는 정시(定施)와 정송(定誦)은 조건 없는 신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안성맞춤인 수행법이다. 마치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는 것처럼,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공기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염송으로 하루를 시작하므로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그 하루를 지혜롭게 보내고, 희사로써 하루를 열어 지족하고 베푸는 복된 날이 되게 하는 정시와 정송은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삶을 은혜와 복덕의 비로 적셔서 해탈의 세계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종단 원로 스승님의 법문에 정시 정송을 잘 실천하면 자성일 불사 잘 지키게 되고 자성일 불사 잘 지키면 월초불공도 잘하게 되는 근기로 발전해 나간다고 말씀하셨다.

그러하기에 복 받는 자격은 의외로 간단하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여여(如如)하게 정시 정송법을 꾸준하게 지켜나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 진언행자 여러분! 기쁘게 버리면서 내일도 어김없이 맑고 지혜롭게 복된 하루 시작합시다!

선혜심인당 주교 대원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