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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호랑이

편집부   
입력 : 2015-03-16  | 수정 :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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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호랑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한국 전래동화집에 비교적 많이 실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 도서관에서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신동흔 지음-을 읽으면서 저도 오랜만에 그 내용을 되짚어 보았는데요. 그 내용을 간추리자면 대략 이렇습니다.

한 나무꾼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집채만 한 호랑이를 만나게 됩니다. 생사의 고비에 처한 나무꾼은 자기도 모르게 호랑이에게 다가가 ‘형님’이라고 부릅니다. 오래 전에 어머니가 낳은 호랑이 형님을 이렇게 만났다면서 반가워 하다가 아직도 눈물로 호랑이 형님을 기다리고 계시다는 어머니 이야기까지 해 줍니다. 그날 밤, 눈시울을 붉히며 어머니를 찾아온 호랑이에게 버선발로 달려 나온 어머니는 제 자식 나무꾼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모든 분별을 내려놓고 호랑이의 목을 끌어안습니다. 왜 이제야 찾아 왔냐며 ‘아들’을 외치는 어머니를 가슴 깊이 느낀 호랑이는 그 날 이후부터 나무꾼의 형님 노릇, 어머니의 자식 노릇을 합니다. 노루도 물어다 던져 놓고 산삼도 캐다 놓고 말입니다. 덕분에 가난하던 나무꾼의 살림은 점점 나아졌지요.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무꾼은 호랑이를 더 형님으로 모시게 되었고 어머니 역시도 그런 호랑이를 더욱 살뜰히 챙겼답니다. 그렇게 한 세상이 가고 마침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호랑이는 어머니 묘를 지키며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합니다. 그리고 시묘살이를 끝낸 날 호랑이 아들은 어머니 무덤 곁에서 죽습니다.

이 이야기는 호환 위기에 처한 나무꾼이 호랑이에게 ‘형님’이라고 말 한 것에서부터 시작 되지요. 저는 나무꾼이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 법화경까지 통달한 당대의 숨어 있던 현자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과 공간 속에 속해 있는 모든 대상, 사람이다 동물이다 기다 아니다 좋다 싫다 ...... 그 모든 대상에 대한 분별을 내려놓은 본래불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저처럼 미혹한 사람이야 죽었다 깨어나도 그 절체절명의 순간 ‘형님’이란 말이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기껏 한다고 하는 게 “살려주세요!” 정도였겠지요.

<삶을 일깨우는 옛이야기의 힘>의 저자 신동흔 님은 거듭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어쩌면 호랑이는 알았을 것이다. 나무꾼이 진짜 자기 동생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나무꾼의 어머니가 진짜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나무꾼이 호랑이를 ‘형님!’이라고 불렀고 어머니가 호랑이의 목을 뜨겁게 끌어안으며 ‘아들아!’ 라고 외친 바로 그 순간! 호랑이는 그들의 말대로 나무꾼의 형님이 되었고 그 어머니의 아들이 되었다.” 라고요. 탁! 머리털이 다 곤두 서는 느낌이 들더군요.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인지요? “말이 씨가 된다!” 어려서부터 많이 듣던 말입니다. 말의 힘이 얼마나 세고 위대한 것인지 아마도 우리의 선조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지요. 실제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는 하물며 생명이랄 수 없는 물 분자나 빛의 입자까지도 긍정적 언어의 파장과 부정적 언어의 파장을 느끼고 그에 대응한다고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하게 증명된 그런 종류의 실험들은 이제는 신기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흔한 과학적 상식이 된 지 오래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혼비백산 돌아가고 있는 세상사에 치이다 보면 알기야 다 알면서도 그게 말처럼 그리 쉽게 되던가요? 말처럼 쉽게? 아이러니한 표현이 되었네요. 아무튼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렇습니다. 효자호랑이를 두고 잘 살다 가고 싶으면 말을 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