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4

편집부   
입력 : 2015-03-16  | 수정 : 201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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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고치는 본심진언

"심인은 육바라밀을 하나로 잡은 것이다. 깨치지 못하는 성품을 고치는 약이 없다 하고 팔자는 독 안에 들어가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은 과거 봉건시대에 범절을 숭상하던 때의 예법(禮法)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든지 고쳐서 살 수 있는 시대이므로 팔자도 능히 좋게 고칠 수가 있다. 팔자 고치는 약은 본심진언이다. 자기 성품을 깨달아 고치면 팔자도 좋게 고쳐진다. 성품의 그림자인 팔자는 바로 육자진언과 육행으로 고칠 수 있다. 육자진언 염송하면 무형중생 제도되고 육행 실천하면 유형중생 제도된다."('실행론' 제2편 제4장 제4절 나)

접목효과

늙은 감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홍시 하나가 시골집 안마당으로 떨어졌다. 고공낙하를 하듯이 땅바닥으로 내려꽂힌 홍시는 ‘철퍼덕’ 하는 소리까지 토하며 납작하게 널브러졌다. 낙하의 위력을 실감케 했다. 까치밥으로 남겨두었던 홍시가 겨우내 꽁꽁 언 채로 버티기를 하다가 봄 마중하는 주인을 만난 반가움에 때맞춰 지상으로 뛰어 내린 듯 싶기도 했다. 형주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진 홍시를 두 손으로 쓸어 담듯이 집어들려 했다. 허사였다. 집을 오래 비운 주인을 대신해 감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이제나저제나 주인이 되돌아올 날만 손꼽아 기다리다가 타 들어간 듯 속이 붉다 못해 핏빛으로 채워진 홍시는 마당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형주는 손바닥에 묻은 핏빛 선명한 홍시를 손가락으로 찍어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럴 수가 없었다.

50년도 더된 늙은 감나무는 어릴 때 아버지와 같이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삼아 접목한 것이었다. 감나무보다 웃자라고 추위에 강할 뿐더러 병충해 피해를 적게 입는다며, 좋은 감을 얻기 위해서는 고욤나무를 대목으로 접목해야 한다고 했던 아버지의 말이 새록새록 기억주머니를 빠져나와 되살아났다. 접목을 하기 위해서는 잘 자란 대목을 선정하는 것이 첫 번째 일이다. 감나무를 접목할 대목으로는 고욤나무가 최고라고 했던 아버지는 감나무가 있을 자리에 고욤나무를 먼저 심어 두었다. 1년 정도 자란 고욤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접목하는 날은 어떤 경사라도 치르는 날처럼 설렜다. 추운 날도 피하고, 너무 더운 날도 가려서 접목을 할 감나무 가지까지 준비되면 거사가 시작된다.

대목으로 지정된 고욤나무를 지상 10센티미터 정도 남겨 놓고 자른 다음 3센티미터 정도 내려 자르기를 한다. 근두접을 하려는 것이다. 준비해두었던 접목할 감나무 가지를 비켜 자르는 일은 그 다음 차례다. 내려 자른 고욤나무의 가장자리 형성층을 찾아 비켜 자른 감나무 가지를 잘 맞춰 끼운다. 이 작업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아버지는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그 이후에는 접목부분이 벌어지거나 느슨하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주기를 한다. 접목한 나무가 살아 남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두 말 하면 잔소리겠지만, 요행보다는 자연의 섭리에 맡겨둘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는 것도 그 때 배웠다.

나중에야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자연의 섭리에 맡겨두기 전에 형성층을 찾아 접목부분을 잘 맞춰서 꽁꽁 동여매는 작업은 전문가적인 예리함을 요구했다. 세월이 흐르고,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형주가 시골집 주인이 되어 주말농장처럼 들락거리면서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수 차례의 실패경험을 겪고 나서였다. 접목해 놓은 가지가 자라지를 못하고 말라죽는 것을 수도 없이 지켜보면서 아버지의 뛰어났던 접목실력이 새삼 일깨워졌던 것이다. 형성층을 찾아 맞추는 작업은 물길을 열어주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원리를 터득한 다음부터 실패는 적었다. 받아들임의 순리를 깨닫고 나서였다.

주말을 맞아 모처럼 찾아든 시골집 감나무 아래서 누리는 호사는 짭짤했다. 늙은 감나무는 너른 바닥을 내어 주고 햇살을 가려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것은 기본이고, 감이며 홍시에 곶감까지 맛보게 해주었다. 덤으로 얻는 수확도 많았다. 형주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칠 때쯤 지난 가을에 딴 감을 깎아서 사랑채에 매달아 두었던 일을 떠올렸다. 더 이상 별다른 손질 한번 하지 않았음에도 곶감은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감나무 아래 있는 사랑채에서 곶감을 꺼내 가족들과 나누어 먹는 기분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포만감을 안겨주었다.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달콤한 곶감을 맛보면서 아버지를 그리워 하다가 형주는 물길이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떠올렸다. 사람이나 동식물이 생명을 연장하면서 살아감에 있어서도 물은 대단히 중요하다. 물은 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도 절대적인 매개체가 된다. 하늘길이 없을 때는 물길을 통해 국가나 사람간의 교류가 시작된 것만 봐서도 분명한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고욤나무 뿌리를 통해 잣아 올린 물길이 감나무 줄기를 통해 이어지면서 생장시키고, 감을 열게 한 생명의 조화를 생각하다가 형주는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됐다. 생장을 위한 감나무 줄기의 몸부림도 물론 있었겠지만, 대목인 고욤나무에 물길을 열어주고 또 받아들이는 감나무 가지의 생존본능으로부터 베풀고 나누는 것,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 점을 알아차린 것이다.

형주는 접목을 통해 사람이 배울 지혜가 그것이라는 사실을 찾아낸 발견자처럼 속으로 ‘유레카’를 외쳤다. 이내 불끈 주먹을 쥐고는 얼굴 앞까지 끌어올리며 탄성을 내지를 뻔했다. 감나무 가지가 물관을 열어 대목인 고욤나무로부터 생장에 필요한 물을 받아들이는 작용은 생각의 전환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한 것이다. 형주는 끓어오르는 희열을 만끽했다. 시골집을 찾을 때마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깨닫거나 얻는 것이 있다고까지 여겨지면서 역시나 이번에도 망설임 끝에 발걸음하기를 잘했다고 자신을 치켜세워 올렸다. 앞으로는 앞뒤 잴 것 없이, 시간이 되면 두 번 다시 생각할 것 없이, 무조건 달려오리라는 다짐도 했다. "선물이란 자기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것이다"라고 한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랄프왈도에머슨의 말을 되뇌며 형주는 또 하나의 선물을 얻은 기분에 들떠 마당으로 내려섰다.

"자기 성품을 깨달아 고치면 팔자도 좋게 고쳐진다"라고 했던 진각성존 회당대종사의 법어가 더욱 또렷하게 이해되면서 논리적인 해석까지 할 수 있게 됐다. "창조적인 에너지는 내적 분열에서 나온다"라고 한 박범신 소설가의 말도 떠올랐다. 세상살이가 그렇고, 모든 일도 마찬가지겠지만 역사가 이루어지고 무엇 하나가 재 탄생되거나 창출되기 위해서는 살붙이 대목인 고욤나무에 물길을 내어 주는 감나무 가지처럼 과감하게 고쳐지고 변하고자 하는 자기변혁의 열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환경적인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내적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뼈가 저밀 정도로 아픈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었던가. 습관이 깊숙이 몸 속 구석구석에, 생각 사이사이에, 의식 여기저기에 배여 있기 때문에 좀체 바꿀 수 없다고 내버려두는 것은 고질을 초래할 뿐이다. '제 버릇 개 줄까'라거나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닌, 엄연한 진리인 것을 실감했다.

고치면 바뀌고 바뀌면 변하게 마련이다. 미련이 남아서, 힘이 들어서, 마음이 아파서 고치지 못한다면 변할 것이 없다. 성품을 깨닫고, 고칠 것을 찾아서 고치면 팔자도 좋게 고쳐진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