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2

편집부   
입력 : 2014-12-02  | 수정 : 2014-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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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부처될 수 있어

"일체중생이 본유살타(本有薩陀)이므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 일체중생의 근본성품은 만인공도(萬人共道)의 불성이므로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불법은 이법(理法)이므로 누구나 실천하면 자기발전과 이익이 따른다. 아무리 좋은 법이라도 자성을 깨치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법은 법대로 있을 뿐 심성개발과 자기발전에는 도움이 없다. 생각이 온전하면 지혜가 일어나고 생각이 흐트러지면 지혜를 잃는다."('실행론' 제2편 제4장 제3절)

벽오동에서 벽오동 난다

벽오동은 너무나 컸다. 다 자라난 벽오동 꼭대기는 아무리 눈을 치켜 뜨더라도 올려다 보이기는커녕 치뜬 눈이 뒤집힐 정도였다. 선 채로 벽오동을 쳐다볼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옳았다. 그 때는 그랬다.
진이가 벽오동을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한 벽오동 키만큼 컸다. 집 뜰에 서 있는 벽오동 아래서 하루종일 놀아도 더 놀고 싶어했을 정도로 좋아했던 벽오동이지만, 희선이가 옆에 있던 어린 시절 벽오동 꼭대기는 절대로 쳐다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다. 진이의 키와 벽오동 키 차이만큼 벽오동 꼭대기를 올려다보기 위한 노력은 아무리 해도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고도 아득하게만 여겨졌다.

벽오동은 다 자라면 10미터가 훌쩍 넘는 큰 키를 뽐낸다. 청자 빛에 못지 않을 에메랄드 같은 푸른빛을 띄는 줄기는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변함 없이 고고한 자태를 자랑한다. 신비감을 갖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다른 나무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자랑거리이자, 부러움의 상징이 되는 것은 두 번 말하면 잔소리가 된다. 허리를 굽히지 않고 곧게 자라는 것은 도도해서가 아니라, 곧은 정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쭉쭉 뻗은 줄기 역시 마찬가지다. 파라솔 같이 넓은 잎은 쓰임새 또한 많다. 한여름 강렬한 햇볕 아래서는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비를 가려주는 우산이 되어 벽오동이 베풀 수 있는 최상의 파라다이스를 제공해준다. 자라는 속도가 빠른 것은 그만큼 할 일이 많아서다. 쓰임새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옛날 사람들은 봉황새가 찾아들어 둥지를 틀고 청아한 소리를 내면 천하가 태평하리라는 염원을 갖게 하는 나무가 벽오동이라고도 했다. 그만큼 희망을 가져다주는 의미도 있다는 말이다. 진이가 벽오동을 좋아했던 이유 중의 일부다.

옆집에 살았던 희선이가 이사를 간지 3년이 지났다. 그새 초등학생이 된 진이는 아침부터 벽오동 아래서 서성거렸다. 토요일이었다. 비가 올 듯 말 듯 찡그린 하늘이 진이의 마음을 아는 듯했다. 커다란 벽오동 옆에는 이사 가기 전에 희선이와 같이 심었던 어린 벽오동이 자라고 있었다.
“나 이사 가는 것은 괜찮은데 벽오동이 보고 싶을 것 같아.”
“그럼 열매를 줄께. 가져가서 심어놓고 봐.”
“열매하고 벽오동하고 같아? 그리고 언제 키워서 봐?”
“벽오동 열매니까 어미 벽오동하고 같겠지……. 그리고 금방 자라나.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 때 진이 아버지가 마침 들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섰다.
“아빠, 아빠, 벽오동 열매를 심으면 벽오동이 나오겠지…….”
진이는 자신 없어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럼, 벽오동 열매 속에는 벽오동을 닮은, 음, 그래 씨라고 하자, 씨가 있어요. 그래서 벽오동 열매가 땅이나 흙 속에서 싹을 틔우고 어린 나무로 자라게 되면 어미 벽오동과 닮아가면서 벽오동이 되는 거지. 더 커서 어미 벽오동과 같을 정도로 자라면 다를 게 없지, 똑 같아.”

진이 아버지는 그 때 벽오동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 자라게 되면 키가 얼마만큼 크며, 줄기 색이 왜 푸른빛인지, 넓은 잎이 가져다주는 고마움과 봉황이 날아와서 둥지를 틀고, 그렇게 되면 어찌어찌 된다는 이야기를 진이와 희선이에게 재미있게 들려주었던 것이다.

진이 아버지의 말을 듣자마자 어미 벽오동을 닮은 어린 벽오동을 생각하며 벽오동 열매를 심기로 했던 그 날도 하늘은 잔뜩 찌푸려 있었다. 헤어질 날을 며칠 앞두지 않은 희선이를 달래주기 위한 생각이었다. 진이가 아침도 그르고 벽오동 아래서 서성거릴 때 희선이 슬며시 다가왔다. 진이 곁으로 다가온 희선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벽오동 열매 두 개가 진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진이로부터 벽오동 열매 두 개를 받아든 희선은 하나를 주머니 속에 넣어두고, 다른 하나는 진이가 미리 파놓은 땅에 살포시 내려놓고 흙을 덮어 토닥토닥한 뒤에 물까지 뿌려주었다.

벽오동 열매를 심자고 한 것은 누가 먼저라 할 것이 없었다. 벽오동 아래서 같이 놀던 때를 생각하면서 진이는 집 뜰에서 자라날 어린 벽오동을 보고, 희선은 화분에서 자랄 벽오동을 보며 서로를 잊지 말자는 마음이 서로 통했기 때문이었다. 어린 벽오동으로 자라날 열매 속에 어미 벽오동을 닮은 것이 있다고 했듯이, 진이와 희선의 생각도 닮아 있었다. 열매가 싹을 틔워 땅을 뚫고 나와서 어미 벽오동 키만큼 자랐을 즈음에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서로가 했을 것이다. 물을 잘 주고 잘 키우자는 다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진이와 희선은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마주보다가 손가락을 걸었다. 진이와 희선은 물기만 남아 있는, 벽오동 열매가 묻혀 있는 땅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잔디 위에 나란히 누웠다. 그때서야 보였다. 진이의 눈에 도무지 보일 것 같지 않던 벽오동 꼭대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흐린 하늘 아래 높다랗게 서있는 벽오동은 거인처럼 하늘에 닿을 듯했다.

희선이와 같이 벽오동 열매를 땅에 묻은 날부터 진이는 집을 드나들 때마다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보고 또 보다가 발길을 돌리려 하다가는 눈이 떨어지지 않아 되돌아보는 일이 버릇처럼 됐다.
진이는 이 날도 거리낌 없이 잔디 위에 드러누워 어미 벽오동을 올려다보았다. 어미 벽오동과 달리 어린 벽오동은 차라리 옆으로 돌아누워야 쳐다볼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작았다. 언제 어미 벽오동만큼 키가 커서 희선이를 만나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때 날듯이 집안으로 들어선 희선이가 어린 벽오동 옆에서 활짝 웃었다. 진이는 놀란 토끼눈으로 희선이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내 어미 벽오동과 어린 벽오동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희선이가 어미 벽오동 위로 날아오르려 하자 진이는 몸을 뒤챘다. 희선이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희선이에게 다가가려고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손을 내밀며 잡고서 일으켜 달라고 애원을 해도 희선은 아랑곳없이 웃으면서 어미 벽오동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진이는 실망을 하며 발버둥을 치다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진이는 어미 벽오동을 오래도록 쳐다봤다. 옆에서 자라고 있는 어린 벽오동도 언젠가는 어미 벽오동을 닮아 저렇게 늠름하고 자랑스럽게 우뚝 서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자리를 털고 떠났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