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으로 배우는 마음공부 20

편집부   
입력 : 2014-09-01  | 수정 : 2014-09-01
+ -

심인공부의 뜻

“심인공부는 내가 짓고 받는 것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다. 깨닫지 못하면 귀신놀음같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리석어서 ‘목신이 와서 도와주는가, 산신이 와서 도와주는가, 수신이 와서 나를 도와주는가, 아니면 이러한 신들이 나를 해롭게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직 내 마음으로 짓고 받는 것이 분명하다.”(‘실행론’ 제2편 제4장 제2절 가)

1만년만에 핀 연꽃

전설의 꽃, 상상 속의 꽃으로만 생각했던 붉은 연꽃을 처음 본 순간 초우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 좀체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남자의 순정을 다 바쳐 난생 첫 여자를 품에 안았을 때의 떨림보다도 더했다. 가람연지에 핀 붉은 연꽃을 처음 발견한 초우는 산에서 나는 약초를 찾아 두 발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가리지 않고 어디든 찾아 헤매고 다녔다. 철 따라, 길 따라 얻는 약초도 가지가지였다.

초우가 붉은 연꽃을 찾아낸 것은 깊은 산 속 작은 연못가에 다다랐을 때다. 그곳이 가람연지라는 것을 안 사실은 나중의 일이었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헤맨 그 때도 늦여름이었던지라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간지럽기까지 했다. 초우는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두 손으로 물을 떠 얼굴을 적셨다. 그리고는 풀 섶을 찾아 드러누웠다. 숨골을 타고 올라와 대롱거리던 거친 숨결은 어느새 잦아들었다. 앙증맞은 새털구름 한 조각이 먼 하늘에 홀로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불면 날아갈 듯, 손을 휘저으면 흩어질 듯한 구름을 보는 순간 미르가 보고 싶었다.

후닥닥, 산짐승 뛰어가는 소리에 놀란 초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을 때 지금까지 맡아보지 못했던 향기가 나는 듯, 마는 듯 은은하게 풍겼다. 처음 본 작은 연못은 삼면이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우묵하게 파인 절구통 같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디딜방아 공이에 찌여도 확 밖으로 튀어 오르지 못하는 곡물처럼, 향기가 산을 넘지 못하고 연못가에 그대로 모이고 모여 있었던 셈이다.

초우는 야릇한 향기에 의지해 마음 속에 미르를 그려보았다. 향기가 미르를 닮았다는 생각이 시나브로 들었기 때문이다. 초우는 혹시라도 미르가 연못가 어딘가에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되지도 않은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켜 향기가 나는 곳을 찾아 살금살금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둔치에서 물가로 내려서서 이리저리 한참을 둘러보아도 향기를 내뿜을 만한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침 불어온 명지바람에 묻혀온 향기가 다시 날아들었다. 초우는 바람이 불어온 쪽으로 눈길을 주다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기설기 엉켜 있는 칡넝쿨에 가려 좀체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약초를 찾아 나설 때처럼 향기를 좇아 무작정 칡넝쿨을 헤치고 얼굴을 디밀었다. 칡넝쿨 뒤에는 붉은 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남들이 절대로 찾지 못하게 누군가가 숨겨서 심어놓은 것처럼 붉은 꽃이 여인네의 가슴팍 만한 넓이로 자리하고 있었다.

첫눈에 연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물위에 뜨다시피 널브러져 있는, 솥뚜껑을 뒤집어 놓은 듯한 커다란 잎에는 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마침 초우의 얼굴에 송알송알 맺혔던 땀방울 하나가 잎사귀에 떨어지자 또르르 미끄러지듯이 금방 물 속으로 풍덩 빠져버렸다. 속을 헤집으니 씨방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어 연꽃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 뿌리는 확인해보나 마나였다. 연꽃이라는 것을 단정한 초우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뻐 어찌할 줄을 몰라 하다가 다리를 삐끗하면서 주저앉아 엉덩이를 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물에 빠진 몸이 시원했다. 여름더위가 순식간에 달아났다. 넓고 크고 둥글고 속이 꽉 찬 연꽃과 연잎, 씨방을 닮은 듯 초우의 마음도 그득함이 느껴졌다.

연꽃과 연잎은 물론 연 뿌리는 버릴 것 하나 없는 식물이다. 굵고 튼실한 뿌리와 잎자루는 먹을 수도 있다. 뿌리를 먹으면 허약한 원기를 북돋워주고 체력을 보강시켜 주는 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입안이 헐거나 염증이 생겼을 때는 달인 물을 머금으면 좋고, 각혈을 하거나 하혈을 하는 때는 즙을 짜서 먹으면 더없이 좋다고 한다. 연잎은 치료제로도 이용된다. 다친 곳을 아물게 하거나 진물을 마르게 하고 피를 멎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잠을 자다가 실수를 하는 오줌치료제로도 탁월하다고 알려진 약초다. 1만년이 지나도 싹을 틔울 수 있으며, 옹골찬 자생력을 가진 덕분에 남녀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하는 연꽃 씨앗은 부작(符作)의 일종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원하는 바를 마음에 새기며 늘 반복해서 생각하고 덕을 쌓아 사람됨의 도리를 다하면 언젠가는 필시 효험을 볼 수 있다는 믿음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널리 퍼져 있기까지 했다. 생명력이 질긴 것으로는 연꽃 씨앗을 당해낼 것이 세상에 더 이상 없는 듯 했다.

초우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연꽃은 전설의 꽃에 다름 아니었다. 초우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로부터 전해들었다는 연꽃에 대한 이야기는 옛 구야국 출현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구야국을 탄생시킨 수로왕이 아내로 맞아들인,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의 왕녀 허황옥의 행적과 관련돼 있다. 아유타국에서 연꽃은 각종 신들의 어머니인 ‘라지브’를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돼 왔다. 구야국의 황후의 몸이 된 아유타국의 왕녀가 바다를 건너 시집오면서 연꽃을 가지고 올 수 없어 씨앗 5알을 가져온 것이 시초라는 것이었다.

황후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처럼 귀한 꽃을 하루빨리 보고 싶어 구야국에 도착하자마자 뒷마당에 연못을 만들어 달라고 해서 정성 들여 씨앗을 심었다. 다시는 가볼 수 없을 먼 나라, 고향을 그리워하며 황후는 매일 같이 연못에 나가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떠나온 친정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도, 연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황후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도 감복을 했던지 씨앗을 심은 바로 그 이듬해부터 연꽃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모두가 신기해하면서 관심을 가졌다. 황후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며 돌보던 연꽃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 크고, 더 아름답게 피어났다. 색깔도 여러 가지로 자태를 뽐냈다. 이 땅의 풍토와 기후에 따라 제 스스로 몸을 바꾼 듯 싶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황후의 애절한 마음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도 모를 일인 듯 했다.

초우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전설의 꽃, 상상 속의 꽃으로만 여겨왔던 연꽃을 직접 보다니……. 눈이 휘둥그레지고 두근두근 가슴이 떨렸다. 머리 속은 하얘지는 것 같았고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눈앞이 캄캄했다. 칡넝쿨 옆으로 피씩 주저앉아 주변을 다시 살펴보았다. 향기만 은은하게 코끝을 자극할 뿐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1만년이 지나도 싹을 틔운다는 연 씨앗은 인(因) 지은 바대로 과(果)를 받는다는 준엄한 진리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연꽃이 불교의 상징화로 간주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아서였다. 초우는 향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뛸 듯이 기쁜 기분에 취해 연꽃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때 미르가 연꽃 위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면 그렇지……. 초우는 미르를 만나기 위해 벌떡 일어나 물 속으로 바쁜 걸음을 옮겼다. 마음만 바빴지 물 속에서 걷는 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좀체 속도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둘 사이가 어느 정도 좁혀졌다 싶으면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 종종걸음을 옮기며 손을 뻗어 보았지만 미르는 잡혀지지 않았다. 미소만 지으며 꿈쩍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1만년의 시간이 필요한 듯 연꽃 위에 서 있는 미르와 초우 사이는 좀체 좁혀지지가 않았다.

정유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