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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信仰)에 숨막힌 사람들을 구하는 수행(修行)

편집부   
입력 : 2014-09-01  | 수정 : 201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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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세상에 종교가 없었다면 극심한 대립과 분쟁의 요인이 크게 줄지는 않았을까 라며 종교를 냉소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종교와는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이라는 단어가 서로 짝을 맞추어 종교전쟁이라는 생경한 개념을 창조해 냈습니다.

저마다의 종교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던지는가 하면, 심지어는 진리 수호의 미명하에 무고한 사람의 생명까지도 앗아갔던 암울했던 세계 역사를 반추해 봅니다.

진리는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참된 이치> 라는 정의에도 불구하고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흔히 자기 종교의 고유한 교리의 의미로 통용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종교란 특정한 믿음을 공유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가 그들이 가진 신앙 체계를 보편적 가치로 믿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견지할 때, 종교는 사회로부터 지탄받는 대상이 되고 맙니다.

다원화한 사회에서 요구되는 덕목 중 중요한 것이 관용입니다. 대체로 종교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저마다 <진리 수호를 위해서> 라는 사명감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 이웃 종교를 적대시거나 진리와 교리를 혼동해서 자신의 교리가 진리의 보편성을 독점하고 있다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타인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는 얻어 낼 수 없으며 스스로 만든 벽 속에 갇히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종교의 궁극 목표는 사물과 자심(自心)을 있는 그대로 관(觀)할 때 얻을 수 있는 해탈의 자유입니다. 예수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했고, 부처님도 생로병사의 실상을 증득하고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 해탈방편을 실천할 때 비로소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종교에라도 열린 마음으로 듣고 배우려는 겸손함은 종교를 가진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교리는 독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리를 누가 독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각자의 교리만이 진리라는 독선이 맞부딪친다면 승부가 나겠습니까? 자신들이 믿는 것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논쟁해서는 승부가 분명히 나지 않을 겁니다. 편협된 사고의 틀 위에 축조된 가치를 고집하는 것은 성장과 발전의 최대 적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진리로 믿고 있는 가치를 공공선을 지향하는 실천으로 옮김으로써 제대로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를 수용하여 실천하는데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상과 스스로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보려는 열린 태도요, 다른 하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닫힌 태도입니다. 물론 여기서 열린 종교냐 닫힌 종교냐를 말할 때, 어느 한 종교는 통째로 열린 종교요, 다른 한 종교는 모두 닫힌 종교라 말하는 것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종교 전통 안에도 열린 태도를 권선하는 심층적 성찰이 있고, 그와 동시에 닫힌 종교의 태도를 주장하는 표층적 아집과 독선이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에 대해 열린 태도를 견지한다면 점점 더 높고, 깊은 차원에서 사물을 보게 되므로 계속하여 자유롭고 여여한 삶을 살게 되지만, 닫힌 태도에 얽매여 헤어나지 못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창백하고 찌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의 삶은 시시각각으로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이 길로 가야할지, 저 길로 가야할지를 선택해야 하고, 이걸 받아들여야 할지, 저걸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인생은 선택과 판단의 연속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이 삶의 태도입니다. 태도는 사실보다 중요합니다. 사실은 중요하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사실이 달라지기도 하기에,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를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태도는 마음이 결정합니다. 하지만 이 때의 마음은 지식이 아닌 지혜의 마음입니다. 이 원리를 잘 알기에 지혜의 마음을 밝히는 공부, 이것이 곧 잘 살 수 있는 길이고, 인격을 완성하는 길이고, 나아가 성불하는 길이라고 진각성존 회당대종사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을 리드해 나가는 사람과 환경에 끌려가는 사람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자기를 다스릴 수 있고,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환경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불교에서는 선지식이라고 부릅니다. 선지식은 자신을 이겨내서 결국 환경마저도 이겨내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남과의 경쟁과 비교를 통해서 얻어진 평가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르게 성찰하였을 때의 희열이 더 가치있는 것입니다.

다양성이라는 것은 좋은 말입니다. 그것은 개방이며 열림이며 포용이며 어울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냥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데 필요하다면 나와 다른 듯이 보이는 것들과의 상생적인 만남을 기피할 이유는 없습니다. 바다에서도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지점에 고기가 많이 모이듯이, 돼지고기와 새우젓이 만날 때 시너지 효과가 나듯이, 서로 다른 것들이 만날 때 창조적인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무엇이든지 이종(異種)이 만나야 스파크가 튀는 법입니다. 문제는 이종이 접합되어 이원상생(二元相生)이 어렵다는 점이다. 양쪽을 모두 알고 양쪽을 모두 소화해야만 소통이 이루어지고 접합이 가능합니다. 이 경지는 수행이 개입됐을 때 가능합니다. 여러모로 수행이 필요한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밀각심인당 주교 수각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