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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향한 의무(義務)

편집부   
입력 : 2014-08-04  | 수정 : 201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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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순간까지 부단히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국가 헌법에서도 ‘행복추구권’이라 하여 국민의 기본권 중 하나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행복추구권’이란 ‘안락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 고통이 없는 상태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실현하는 권리’로 정의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 주장이 국가단체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서 당연히 실천해야할 의무라는 것이 항상 먼저 강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국가라는 테두리를 보호하고 그 안에서 구성원 모두가 잘 살아가는 이치입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의무를 충실하게 잘 이행해 나갈 때 행복이라는 기본 권리가 충족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현실의 구체화된 법의 테두리를 넘어선 진리 법계의 세계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성공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그 목표를 이룬 사람은 전 세계 인구 중 1% 미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목표를 이룬 1% 미만인 사람들의 행복 비결은 무엇일까요? 행복과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인 대인관계라고 합니다.

개개인의 행복지수는 바로 대인관계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인관계에 있어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마다 다 조금씩 다를 수 있기에 한 가지일 수는 없겠지만, 대인관계에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분모를 찾자면 그것은, 바로 ‘이타적(利他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효과(The mother Teresa Effect)’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 돕는 활동을 통해 일어나는 정신적, 신체적 변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1998년 미국 하버드 의과 대학에서 실험한 연구 결과입니다. 연구 팀은 하버드 학생들에게 테레사 수녀가 인도에서 환자를 돌보며 봉사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여 준 다음, 이들의 면역 항체 수치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측정해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수치가 이전보다 50% 이상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이 선한 일을 생각하거나 그것을 간접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몸속에서 놀라운 치유력과 면역 항체가 생긴다는 것을 보여 준 실험이었습니다. 물론 자신이 직접 타인을 위한 봉사나 선행을 베풀면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겠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괴테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는 요령이 있어야 한다. 누구를 대하든 자신이 아랫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저절로 자세가 겸손해지고, 이로써 상대에게 좋은 인상을 안겨준다. 그리고 상대는 결국 마음을 연다.’ 한편 영어에 ‘이해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는 바로 ‘understand’ 입니다. 이 단어는 under(아래에)와 stand(서다)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즉 어떤 사람의 아래에 서있으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자기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입장에 서 있을 때 가능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보다 아래의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보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현실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보다 더 높은 위치로 올라서려고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의 가르침인 희사(喜捨)와 하심(下心)입니다. 행복이라는 권리를 충족하기 위한 진리세계의 의무는 다름 아닌 희사와 하심입니다. 희사는 만법을 보육(保育)하는 베푸는 마음이고, 하심은 내가 잘났고 다른 사람을 낮게 여기는 상(相)을 여의는 것입니다.

회당 대종사께서도 ‘인심(人心)은 천심(天心)이므로 경제가 주동(主動)인 오늘에는 희사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사상(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없애고 행복으로 나가려는 서원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처럼 행복으로 나아가는 법계 진리의 가르침은 ‘희사와 하심’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실천 이행해야할 의무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희사와 하심이 조건이 없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조건이 없다는 것은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바라밀(波羅蜜)입니다.

바라밀은 완성입니다. 희사바라밀, 하심바라밀이 된다는 것은 완성된 희사의 상태이고, 완성된 하심의 상태입니다. 즉 희사하고 안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 그리고 하심하고 안하는 마음이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상대방에게 베푸는 것이 재물일 수도 있고 마음일 수도 있고 그 외 다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Give & Take 또는 ‘가는 정이 있으면 오는 정이 있다’라고 말합니다만, 이 단어와 속담 속에는 ‘대가를 바란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대가를 기대하거나 바라는 마음은 완성된 베풂이 아니기에 또 다른 스트레스로 되돌아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에는 만원을 베풀어 놓고 만 원 이상의 것을 기대하는 것이 늘 잠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에게 상이 되어 하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차라리 베풀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따라서 Give & Take는 Give & Give나 Give & Forget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베풀고 또 베풀고, 베풀고 또 잊어버려야 합니다. 회당 대종사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무상(無相)을 주장하더라도 자기가 한 일에 칭찬받기를 좋아하면 그 사람은 곧 유상(有相)이 된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정과 직장과 이웃과 사회에서 대인관계에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조건 없이 희사하는 마음과 조건 없이 하심하는 마음인 희사바라밀과 하심바라밀이 삶의 의무가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1% 미만의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과 성공의 문이 됩니다.

안산심인당 주교 보성 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