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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공(空)놀이

민경성(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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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조가 물레방아 돌듯하고 사회 정치적인 신조가 버드나무 늘어지듯 하는 이 시절, 이 땅에 찾아온 네덜란드인 축구 감독 거스 히딩크.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난 지금 새삼스레 돌아보니 형은 참 축구공 하나로 너무나 멋진 세상을 보여 주었소. 솔직히 일년반 전에 우리 눈에 비친 형의 모습은 반신반의 그것이었소. 짙은 눈썹사이로 현침살이 세로로 패인 것은 그 집념을 읽을 수 있었고 갸름한 관골 위에 깊숙이 들어앉아 형형이 빛나는 두 눈은 정직함과 비전을 말해 주고 있었으나 양쪽 눈 끝 어미에서 간문쪽으로 가로로 웃고 있는 잔주름들이나 엘리자베스라고 하는 흑인 여성을 앞세우고 온 모습은 간단치 않은 색난을 보여주는 듯 했소. 그러나 어쩌겠소. 1653년 효종 4년 일행 36명과 함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서울로 압송된 뒤 훈련도감에 편입돼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 일행 7명과 같이 탈출해 하멜 표류기를 쓴 형의 선조 하멜과는 달리, 월드컵에 네 번인가 출전해서 일승도 못 올린 한국축구의 한을 씻기 위해 우리가 거금을 들여 정중히 모셔 온 당신인데. 그러나 역시 기본을 중시하고 목표를 정한 뒤 호시우보(虎視牛步)해 나가던 형의 태극전사들이 끝내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지를 줄이야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었겠소. 처음엔 일승과 함께 16강이 목표였던 것이 16강에서 8강으로 8강에서 다시 4강까지 올라갔을 땐 그 천지개벽을 알리던 붉은 악마들의 함성소리와 함께 이 삼천리 한반도 꼬레아는 완전히 뒤집혀 버렸고 그때까지 축구를 잘 몰랐던 우리는 진정 축구를 다시 보게 되었소. 진정 축구는 재미있는 놀이였고 인간들의 원시적 폭력성을 게임으로 만들어 즐기고 있는 현대인들의 광기어린 축제였던 것 같으오. 지금 시간이 점점 흘러감에 따라 환호와 흥분으로 출렁거렸던 기억들이 다시 익명의 바다에 나와 귀에 익은 이름들을 불러보며 반걸음 옮기고 있소. 명보, 선홍이, 진철이, 태영이, 영표, 상철이, 천수, 두리, 기현이, 정환이, 종국이, 운재 그리고 당신 거스 히딩크와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