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 만다라

행복한 하루

김영희(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 -
지난 일요일은 남양주에 있는 어느 절을 다녀왔다. 비 온 뒤라 그런지 말갛게 씻긴 산과 들이 풀어놓은 색감들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절에 도착해 늦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절 주변에는 온갖 유실수들이 주렁주렁 열매를 매달고 뜨거운 여름햇살을 견디고 있었다. 빨갛게 익은 보리수 열매며, 살구, 복숭아, 포도, 매실… 적어도 나에게는 어느 것 한 가지도 신기(?)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삭막한 도심에서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상황과 맞닥트린 탓인지 같이 간 친구도 마냥 감탄사를 연발해대는 것이었다. 농익어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보리수 열매로 나무 주변은 불긋불긋한 수를 놓고 있었다. 한 움큼을 따서 입안에 넣었다. 새콤달콤한 맛이 한껏 고여 든 입 속에는 내내 미묘한 향이 감돌았다. 한 동안을 그 열매에 취해 있다 이번에는 텃밭으로 나갔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감동의 물결을 만났다. 풀 한 포기 없이 말갛게 정돈된 밭에서는 갖은 채소들(고추, 아욱, 상추, 열무, 쑥갓…)이 마치 키 작은 장난감병정처럼 도열(?)하고 있었다. 그저 바라만 봐도 마음 한 구석이 환해지고 한없는 여유로움이 느껴져 왔다. 주변을 다 둘러보아도 어느 곳, 어느 하나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나무며 돌멩이 하나 하나에도 마치 살아있는 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물며 저 푸성귀 이파리들에도 사람의 손길과 정성이 닿으면 저토록 빛나는 감동의 물결이 일렁일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돌아올 때, 공양주께서는 풋고추며 오이소박이김치까지 챙겨 주시는 것이었다. 지천으로 열린 오이를 감당할 수 없어 장아찌며 김치를 담았더니 이제는 더는 보관할 장소가 없다는 말까지 곁들이면서 말이다. '사람의 정성과 손길이 닿는 곳이면 모든 생명들은 반드시 그에 따르는 보답을 한다'는 스님의 말씀이 내내 귀에 쟁쟁하다. 그렇다. 어디 꼭 생명 있는 것들뿐이겠는가. 비록 생명이 없는 돌멩이도 사람의 온기가 닿으면 말갛게 눈을 뜨고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더러 있듯이…. 날마다 희뿌연 하늘아래, 채 바퀴 돌 듯한 어김없는 일상을 벗어나 모처럼 마냥 한가로운 하루를 보낸― 그 날은 참으로 행복한 하루였었다. 거기다 푸른 하늘 흰 구름, 그야말로 천지는 한껏 빛 부신 색채들의 조화로 어우러져 있었다. 그간 얼마나 많은 것들에 우리들은 끄달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한 치의 이익에 자신의 생명과 뿌리를 마구 파헤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제할 줄 모르는 욕망으로 하여 낮과 밤을 비틀거리는 사람, 미움과 질투로 온갖 악업을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