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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포에서

김남환(시조시인)   
입력 : 2003-03-18  | 수정 :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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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충북 제천에 살고 있는 사촌 내외의 안내로 영월의 명소인 청령포를 찾아 단종의 애달픈 유적을 더듬어 볼 수 있었다. 육칠 년쯤 되었을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혼자서 청령포 나룻배를 탔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내가 어렸을 때 김천시에는 극장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날 밤 어머니를 따라 악극단 구경을 갔었다. 그 때 '단종 애사'란 연극을 보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같이 생생하다. 극중 어린 단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저 새 소리도 마지막, 저 뻐꾸기 소리도 마지막…"하며 절규하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우리 일행은 배를 내려 자갈밭을 지나 청령포 솔밭으로 들어섰다. 그 옛날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귀양 온 단종(노산군)이 두고 온 비(妃)가 그리워 어린 소나무 가지에 올라가 한양 하늘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는 그 나무가 600년을 살며 역사를 보고 들었다고 하여 '관음송'이라는 이름을 얻고 거목이 되어 있다. 그 관음송은 푸른 솔바람을 일으키며 청령포를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고 그 슬픈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이 청령포를 찾았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단종이 유배생활을 하던 집(안채)과 행랑채를 복원해 놓아 애절한 역사를 실감케 하고 있다. 좁은 방에 앉아 글을 읽고 있는 단종의 모습이며 시종들 그리고 행랑채에 있는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 침모와 부엌에서 일하는 식모 등을 실물 크기의 인형으로 재현해 놓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문득 마루 앞에서 올려다보니 단종이 지은 시 한 수가 눈에 들어왔다. 천추의 원한을 가슴 깊이 품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 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그렇다. 세조가 아무리 치세를 잘했다고 하더라도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고 목숨까지 앗은 크나큰 불의는 만고에 지울 수 없는 죄과로 남을 것이며, 한편 숙부에서 왕위를 빼앗기고 죽어간 단종의 푸르디푸른 혼령은 시방도 청령포를 감싸고 도는 강물 위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